영조와 노론이 빚은 최악의 참극…“권력과 왕위는 천륜보다 우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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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노론이 빚은 최악의 참극…“권력과 왕위는 천륜보다 우선한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10.1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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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읽기>① 영조의 ‘콤플렉스’와 사도세자의 비극
▲ 영조와 정순왕후가 안장된 원릉. 원안은 영조의 어진.
◇ 글 싣는 순서
① 영조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이유는? 
② 재앙의 징조…나주 벽서 사건과 토역정시(討逆庭試) 사건
③ 세자, 노론의 일당 독재에 맞서다! 
④ 노론의 마지막 승부수…나경언의 고변
⑤ 영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다
⑥ 영조와 노론이 빚은 최악의 참극 - “권력과 왕위(王位)는 천륜(天倫)보다 우선 한다!”

[한정주=역사평론가] 정적(政敵)이 사라졌다는 권력자의 안도감 때문인지, 아니면 차마 자식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는 아버지의 회한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영조는 세자가 뒤주에서 죽은 윤5월21일 그날 즉시 세자를 폐서인한다는 명을 거두고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러나 세자의 작호는 되돌릴 수 있었지만 영조와 노론이 빚은 조선 왕조사 최악의 참극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노론의 권력 투쟁이 이미 천륜과 인륜까지 저버리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반증하는 사건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집권 세력이 된 서인이 ‘국혼(國婚)을 통해’ 권력을 지키려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때만 해도 서인이 최소한 국법(國法)과 사회 윤리의 질서 안에서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경종 이후 서인 중 특히 노론 세력은 ‘국혼(國婚)’을 넘어서 ‘택군(擇君)’의 길을 걸었다. 곧 노론은 자신들과 당론과 당습을 달리하는 임금이나 세자를 내쫓거나 죽이는 것도 결코 꺼리지 않았다.

이때부터 노론의 ‘일당 독재’는 국법이나 윤리보다 더 우선하는 가치이자 ‘지상과제’가 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융릉. 원안은 사도세자의 초상화.

그렇다면 영조의 행동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만약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임금의 자리를 위해 자신을 사랑했던 형까지 죽인 사람이 왕위를 위해 이미 사랑이 식어버린 자식을 죽이는 것은 별반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울러 평생 ‘과거의 어두운 그늘’로부터 끝내 자유로울 수 없었던 영조의 강박 관념 곧 스스로 천륜(天倫)을 배반한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세자 또한 능히 왕권을 찬탈할 목적으로 천륜(天倫)을 배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아닐까?

여하튼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때늦은 후회에 무척 괴로워했다고 한다.

“아, 임오년(壬午年:1762년)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자질이 훌륭했건만 내가 진실로 인자하지 못했다. 지난 일을 세삼스레 제기하여 나에게 들리도록 하는 것은 반역하는 심보이다. … 누워서 세손의 오늘날 심정을 생각해 보건대, 어찌 다만 어린 자식의 심정뿐이겠는가. 나의 심정 또한 어떻겠는가. 오늘날처럼 마음이 괴롭기란 진실로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정조실록(正祖實錄)』13년(1789년) 10월7일 ‘어제장헌대왕지문’

그러나 이러한 후회와 뉘우침에도 영조는 천륜과 인륜보다 권력과 왕권을 우선시한 임금이었다는 혹독한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영조는 철저하게 ‘노론’다운 임금이었다.

국법(國法)과 윤리를 초월해 존재하는 권력은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자동차’나 다름없다. 영조는 ‘경종과 사도세자의 죽음’을 통해 노론 세력에게 그러한 권력을 선사한 셈이다.

그리고 18∼19세기 조선의 역사는 노론이 휘두르는 그 권력 앞에 ‘개혁의 희망’도 ‘근대의 꿈’도 모두 좌절당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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