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誠意) 다해 쌓인다면 어찌 현령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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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誠意) 다해 쌓인다면 어찌 현령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겠는가”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9.08.14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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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인문학] 제14강 치정편(治政篇)…정사를 다스려라⑥
성리학사에서 ‘정자(程子)’ 혹은 ‘정자(程子) 형제’라고 불리는 형 정명도(왼쪽)와 동생 정이천(가운데). 오른쪽은 순자.
성리학사에서 ‘정자(程子)’ 혹은 ‘정자(程子) 형제’라고 불리는 형 정명도(왼쪽)와 동생 정이천(가운데). 오른쪽은 순자.

[한정주=역사평론가] 或問(혹문)하되 簿(부)는 佐令者也(부령자야)니 簿所欲爲(부소욕위)를 令或不從(영혹부종)이면 奈何(내하)닛고 伊川先生曰(이천선생왈) 當以誠意動之(당이성의동지)니라 今令與簿不和(금령여부불화)는 便是爭私意(변시쟁사의)요 令(영)은 是邑之長(시읍지장)이니 若能以事父兄之道(약능이사부형지도)로 事之(사지)하여 過則歸己(과즉귀기)하고 善則唯恐不歸於令(선즉유공불귀어령)하여 積此誠意(적차성의)면 豈有不動得人(기유부동득인)이리오.

(어떤 사람이 물었다. “주부(主簿)는 현령(縣令)을 보좌하는 사람입니다. 주부가 하고자 하는 일을 현령이 혹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천선생이 대답하였다. “마땅히 성의(誠意)를 다해 현령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지금 현령과 주부가 화합하지 못하는 것은 서로 개인의 뜻만 주장하며 다투기 때문이다. 현령은 고을의 수장(首長)이다. 만약 주부가 아버지와 형을 섬기는 도리로 현령을 섬겨서 잘못이 있다면 자신에게 돌리고, 잘한 일에 대해서는 오직 현령의 공적으로 돌아가지 않을까봐 염려하고 두려워하며 항상 성의를 다하는 것이 쌓인다면 어찌 현령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겠는가?”)

주부(主簿)는 지방 고을의 기록이나 문서 또는 물품 출납 등의 일을 맡아 하는 낮은 관직의 벼슬아치이다. 반면 현령은 지방 고을을 다스리는 수장(首長)이다.

『명심보감』의 엮은이가 인용하고 있는 이 구절 역시 『근사록』의 제10권 <군자처사지법(君子處事之法)>에 나오는 내용인데 정명도의 동생 정이천이 한 말이다.

대개 유학의 역사, 특히 성리학사에서는 형 정명도와 동생 정이천을 가리켜 ‘정자(程子)’ 혹은 ‘정자(程子) 형제’라고 부르고 있다. 더욱이 성리학사에서는 정자 형제를 주자(주희)와 함께 거의 공자나 맹자에 버금가는 성인 또는 현인의 반열에 오른 인물로 보기도 한다.

다만 정명도와 정이천의 철학적·사상적 차원과 경지를 평가할 때 형 정명도보다는 동생 정이천의 높이와 깊이가 훨씬 더 높고 깊다고 하겠다.

어쨌든 여기 정이천의 말 역시 앞서 소개한 『동몽훈』에서 강조한 관리가 갖추어야 할 도리, 즉 ‘공경하는 마음과 정성스러운 마음을 다해야 비로소 사람을 감동시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그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할 때나 임금이 신하를 대할 때나 신하가 백성을 대할 때나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할 때나 상관없이 적용할 수 있는 변함없는 가치이자 덕목이다.

순자는 자신의 저서 『순자』 <의병(議兵)> 편에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따르게 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그 첫째가 ‘덕(德)으로 따르게 하는 방법’이라면 둘째는 ‘힘[力]으로 따르게 하는 방법’이고 셋째는 ‘부(富)로 따르게 하는 방법’이다.

자신의 명성을 귀하게 여기고 덕행(德行)을 아름답게 여겨서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껴안아주고 공경으로 대하며 정성을 다하여 안락하게 해주는 것이 ‘덕으로 따르게 하는 방법’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권력과 세력에 겁을 먹어서 감히 자신을 거스르거나 배반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힘으로 따르게 하는 방법’이다.

가난해 재물을 구하고 굶주려서 식량과 음식을 구하는 다른 사람을 자신이 소유한 부(富)에 무릎 꿇고 복종하게 하는 것이 ‘부로 따르게 하는 방법’이다.

그러면서 순자는 ‘덕으로 따르게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덕을 더욱 보태주기 때문에 왕자(王者)가 되는 반면 ‘힘으로 따르게 하는 사람’은 힘으로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는 데 소모되는 비용 때문에 오히려 힘이 약화되고, ‘부로 따르게 하는 사람’ 역시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는데 자신의 재물을 소비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난해진다고 지적한다.

그런 의미에서 ‘덕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만이 오래도록 자신의 덕을 지킬 수 있다고 하겠다.

『동몽훈』의 여본중이나 『근사록』의 정이천이나 『순자』의 순자나 모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공경을 다하는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그것은 『명심보감』의 엮은이가 이번 제14강의 주제인 ‘치정(治政)’, 곧 ‘정사를 다스리는 도리’에서 전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가르침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정치의 근본’은 바로 ‘공경을 다하는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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