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孤山) 윤선도① ‘외롭게 홀로 서 있는 산’과 같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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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孤山) 윤선도① ‘외롭게 홀로 서 있는 산’과 같은 삶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10.19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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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⑲
▲ 고산 윤선도 표준영정

[한정주=역사평론가] ‘사림의 전성시대’였던 16세기에 영남사림이 도학(道學:성리학) 연구에 힘을 쏟았던 반면 호남사림은 문학 방면에서 큰 재능을 발휘했던 사실은 앞서 ‘면앙정(俛仰亭) 송순과 송강(松江) 정철’ 편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런데 17세기에 들어와 또 한 명의 걸출한 스타 시인을 배출하면서 호남사림은 문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 걸출한 스타 시인은 다름 아닌 고산(孤山) 윤선도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씨는 김소월과 윤동주에 견줄 만한 옛 시인으로는 송강 정철과 고산 윤도선만 꼽을 수 있다면서, 이 두 사람을 한문(漢文)이 ‘보편문자’였던 시대에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빛낸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칭송했다.

여기에다 윤선도를 특별히 ‘자연미의 시인’이라고 했는데, 그 까닭은 윤선도의 작품들이 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는 것과 더불어 그 언어와 리듬이 지극히 부드럽고 서정적이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고미숙, 『윤선도 평전』, 한겨레출판사, 2013. p25∼26 참조).

게다가 윤선도는 사대부의 주류 문화였던 한시(漢詩)에 비해 홀대당하고 있던 시조에 우리말의 감성과 서정성의 숨결을 불어넣어 미학(美學)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유일무이한 시인이었다.

그러나 시인으로서 윤선도는 ‘최고’였지만, 그의 삶은 고산(孤山)이라는 호처럼 외롭고 고독했다.

필자는 호(號)와 관련한 옛 사람들의 자취와 행적을 탐구하면서 호와 그 사람의 삶이 많이 닮아 있다는 사실을 자주 깨닫곤 한다. 그렇지만 윤선도처럼 자신의 호와 삶이 닮아 있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먼저 윤선도하면 떠오르는 고산이라는 호의 유래부터 알아보자. 현재 윤선도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은 대부분 전남 해남과 그 주변 보길도에 남아 있지만 사실 그는 한양 연화방(蓮花坊: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한양과 멀리 떨어져 있는 땅끝 마을 해남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은 시기는 나이 8세 때인 1594년(선조 27년) 백부(伯父)인 관찰공(觀察公) 윤유기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해남 윤씨 대종가(大宗家)의 대를 잇는 종손(宗孫)이 되면서부터였다.

윤선도가 호남 제일의 명문가이자 대부호인 해남 윤씨 가문의 종손이 된 과정은 좀 복잡하다. 윤선도의 양부(養父)인 윤유기는 족보상으로는 백부였지만 실제로는 숙부(叔父)였다.

해남 윤씨 가문이 뛰어난 학문과 예술적 자질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시기는 윤선도의 증조부인 귤정(橘亭) 윤구 때부터였다. 윤구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는데, 당시 사림의 리더이자 개혁가였던 정암 조광조와 뜻을 같이 하면서 낙향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윤구는 이후 명실상부 호남사림을 대표하는 거물이 되었다. 윤구는 슬하에 윤홍중·윤의중·윤공중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인 윤홍중은 아들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바로 아래 동생인 윤의중의 두 아들인 윤유심과 윤유기 중 차남인 윤유기를 양자로 들였다.

그런데 윤유기 또한 아들을 두지 못했다. 이에 형인 윤유심의 세 아들인 윤선언, 윤선도, 윤선계 중 차남인 윤선도를 양자로 들였다. 실제 관계로는 작은 아버지였지만 족보상으로는 큰 아버지였던 윤유기에게 양자로 들어가면서 윤선도는 호남 제일의 명문가이자 대부호였던 해남 윤씨의 대종손(大宗孫)이 되었던 것이다.

윤선도의 양부 윤유기는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해 종2품 당상관인 강원도 관찰사까지 지냈다. 대부호에다가 고위 관료까지 지냈던 윤유기는 한양과 해남의 대저택 외에 경기도 양주(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에도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윤선도는 어렸을 때부터 양주에 위치한 별장을 자주 왕래했고 거주하기도 했다.

윤선도는 22세(1608년. 선조 41년) 때 양모(養母) 구씨를 잃고 다음해(광해군 1년) 생모(生母) 안씨의 상(喪)을 당한 데다가 26세가 되는 1612년(광해군 4년)에는 생부(生父)인 유심까지 떠나보내야 했다. 양어머니와 친부모를 연이어 잃은 충격에 크게 상심했던 윤선도가 슬픔을 달래기 위해 일부러 찾아갈 만큼 양주의 별장은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의 추억이 서린 정든 공간이었다.

▲ 고산 윤선도의 시문집 『고산유고』

“파촌(琶村)의 옛집에 와 보니 / 예전에 부모님 거처했던 곳이지 / 부엌에는 술 거르는 곳 남아 있고 / 벽에는 하인들 해야 할 일 써놓은 글 붙어 있네 / 나를 길러주신 부모님 장차 뵐 것만 같은데 / 우러러 뵙고 의지하려고 해도 끝내 헛일이네 / 우는 모양 부녀자와 같은 줄 알지만 /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네.

예전 우리 아버지께서 / 집을 옮겨 바닷가에 이르렀지 / 항상 찾아서 좋은 일 이루었고 / 열에 여덟아홉은 좋은 이웃 만났네 / 뽕나무와 가래나무는 천연의 모습 예전 그대로인데 / 소나무와 개오동나무는 모두 새로울 뿐이네 / 어찌 차마 경사스러운 노인이라는 말을 듣겠는가 / 이미 무덤 속 사람이 되어 되어버렸는데.

생각 하네 지나간 옛날 / 어릴 적 밖에서 돌아오면 / 국 끊이려고 어머니 바삐 움직이셨고 / 빨리 밥 하라고 아버지 재촉하셨네.

생각 하네 지나간 옛날 / 어릴 적 밖에서 돌아오면 / 추운지 따뜻한지 아버지 물으셨고 / 어머니 새 옷을 주셨네.

생각 하네 지나간 옛날 / 어릴 적 밖에서 돌아오면 / 기쁘고 즐겁게 집안의 경사 마치고 나서 / 어머니 모시고 앉아 있었지.” 『고산유고(孤山遺稿)』, ‘을묘년(1615년) 섣달에 남양(南陽) 큰아버지의 옛집에 갔다가 감상에 젖어 율시 두 수를 짓다. 또한 옛날을 생각하며 세 수를 짓다(乙卯臘月往南陽伯父舊宅有感吟二律又賦記得昔年日三章)’

고산이라는 윤선도의 호 또한 별장이 있던 양주에서 비롯되었다. 한강 주변에 위치한 이곳은 홍수가 나 강이 범람하면 사면이 물에 잠기곤 했는데 유독 ‘퇴매재산’만 우뚝 솟아 남았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물바다에 외로운 섬처럼 솟아 있는 이 산을 가리켜 ‘고산(孤山)’이라고 했는데, 윤선도는 이 고산이 세상의 비난과 비방에 맞서 홀로 선 자신의 고고한 기상은 물론 외롭고 고독했던 자신의 인생과 닮았다고 해서 자호(自號)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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