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 당적의 왕세제(王世弟) ‘연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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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당적의 왕세제(王世弟) ‘연잉군’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10.20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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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읽기>② 영조의 양위(讓位) 소동과 탕평정치(蕩平政治)
▲ 조선 역사에서 임금 생전에 왕세제로 책봉돼 보위에 오른 임금은 태종(왼쪽)과 영조 두 차례였다.
◇ 글 싣는 순서
① 노론 당적의 왕세제(王世弟) ‘연잉군’
② “이복 형(경종)을 독살했다”는 비난 속에 왕위 오르다
③ 그치지 않은 경종 독살 비난…이인좌의 난과 탕평정국   
④ 당쟁을 막으려 양위 선언 하다…“나를 임금으로 대우하지 않는데 무엇 하겠는가?”
⑤ 좌절당한 탕평 세상과 다가오는 비극

[한정주=역사평론가] 조선사에는 임금의 아들이 아닌 아우가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어서 보위(寶位)에 오른 경우가 두 차례 있었다. 정종의 아우였던 태종과 경종의 아우였던 영조가 그들이다.

물론 제13대 명종 또한 인종의 이복 아우였다. 그러나 명종은 인종 생존 시 왕세제로 책봉되지는 않았다. 인종은 즉위 9개월 만에 후사(後嗣)를 두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고, 또한 문정왕후(인종의 계모이자 명종의 친모)가 서슬 퍼렇게 왕실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항력적으로 명종에게 보위를 이으라는 유언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 부자(父子) 승계를 원칙으로 왕조의 정통성을 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분명 이러한 상황들은 모두 예외적일 뿐 아니라 비정상적이다.

예를 들어보자. 명종 또한 이복 형 인종처럼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이때 명종의 비(妃) 인순왕후 심씨는 임금의 유언과 종친의 천거에 따라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을 양자로 받아들여 보위에 오르도록 했다. 그가 바로 선조 임금이다.

명종은 중종과 문정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선조의 친아버지인 덕흥군은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명종과 덕흥군은 이복형제 사이였고, 선조는 명종의 조카였던 셈이다. 조카를 양자로 삼아서 대(代)를 이은 것이다.

이렇듯 당시는 형제상속이 아닌-양자를 받아 들여서라도-부자상속이 엄격히 지켜야 할 법도였고 또 당연한 상식이었다.

더욱이 아직 임금이 두 눈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도 아우를 다음 보위에 오를 왕세제(王世弟)로 삼는다는 것은 곧 스스로 생산 능력이 없거나 임금의 자리를 지킬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선전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아무리 후사를 두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임금이 나서서 아우를 왕세제로 책봉하거나 혹은 감히 신하된 자로서 ‘왕세제 책봉’ 운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신하된 자가 감히 ‘왕세제 책봉’을 입에 올린다면, 그것은 임금을 능멸한 불경죄나 혹은 역심(逆心)을 품은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정종이야 워낙 태종 이방원이 일시적으로 내세운 ‘허수아비 임금’이었으니 어떻게 아우의 신분으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는지 구태여 따져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영조는 어떻게 형제승계(兄弟承繼)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는 ‘일당(一黨) 독재’를 향한 노론 세력의 집요하고도 줄기찬 ‘권력 장악 프로젝트’가 자리하고 있다.

경종 즉위 초 권력 상황은 숙종 말년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조정의 권력은 여전히 노론 손에 있었고, 그만큼 경종의 정치적 입지는 좁을 수밖에 없었다. 노론 세력은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직접적으로 그를 겨냥한 정치적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을 안치한 서오릉 대빈묘.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

경종이 임금에 오른 지 3개월이 다 되어가던 1720년 9월7일 노론 계열의 성균관 유생 윤지술이 앞장서서 경종의 생모인 장희빈을 사사(賜死)한 일을 선왕(숙종)의 행장에 기록해 그 처분의 정당함을 남겨두자고 상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사년(辛巳年)의 변고(變故: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다 죽임을 당한 사건)는 남모르게 비밀스럽게 처리하여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선왕(숙종)께서 그 기미를 밝게 살피시고 법을 제대로 세워서 궁중을 엄숙하게 다스리고 여론이 분노해 들끓는 것을 진정시키셨습니다. 이것은 옛 책 속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마땅히 노론이 옳다고 판정한 병신년(丙申年)의 처분도 함께 기재해야 합니다.”

경종은 이 상소가 자신을 노론의 손아귀에 두려는 일종의 정치 시위임을 간파하고 즉시 윤지술을 멀리 유배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영의정 김창집을 비롯한 노론 대신들과 삼사(三司)의 대간(臺諫)들이 교대로 ‘선비의 사기를 꺾어서는 안 된다’고 상소해 결국 경종의 어명(御命)을 꺾어버렸다.

경종은 생모인 장희빈을 죽인 일이 정당하다고 자신을 능멸한 성균관 유생 하나 마음대로 처벌할 수 없는 무력한 임금임을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소론 계열의 향촌 유생 조중우라는 사람이 “희빈 장씨의 은덕을 갚으십시오”라고 상소하자 노론은 일제히 들고 일어나 그를 감옥에 가두게 하고 심문하는 도중 장살(仗殺)해버렸다.

이렇듯 노론의 당력(黨力) 앞에 경종은 무기력한 임금에 불과했다. 그러나 권력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노회(老獪)한 노론의 대신들은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결코 지울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은 자신들의 손에 권력이 쥐어져 있지만, 정치적 반대파인 소론의 세력 또한 만만치 않고 더욱이 시간이 지날수록 경종의 정치적 힘과 영향력 역시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노론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현재의 조정 상황과 형세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두려움 속에서 계속 사느니 차라리 당파의 명운(命運)을 걸고 경종과 한판 승부를 벌이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노론이 던진 승부수가 바로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것’이었다. 신하들이 나서서 임금을 선택했다는 죄목에 걸려 자칫 역적이 될 수도 있었지만 노론의 앞날을 위해서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경종과 그의 왕비였던 선의왕후는 후사가 없을 경우 양자를 들여서 왕위를 물려줄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노론은 이 ‘양자 문제’가 조정에서 공론화되기 이전에 왕세제 책봉을 마무리 짓기 위해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 경종실록. <한국학중앙연구원 홈페이지>

경종이 왕위에 오른 지 1년이 지난 1721년 8월20일 마침내 노론은 경종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고 있고 또한 다음 보위를 이을 후사를 두지 못했다는 것을 명분 삼아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는 일을 들고 나왔다. 왕세제 책봉 문제를 처음 거론한 자는 노론 대신들의 지시를 받은 사간원 정언(正言) 이정소였다.

“지금 전하께서는 춘추가 한창이신데도 아직 후사를 두지 못했습니다. 다만 조정 안팎의 신민(臣民)만이 근심하고 걱정하며 탄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선왕(숙종)의 혼령께서도 돌아보시고 답답해하실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이 일을 자성(慈聖: 대비)께 아뢰고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시는 것이 바로 사직(社稷)의 대책을 정하는 것이며, 억조(億兆) 신민의 큰 소망을 이루는 일이 될 것입니다.” 『경종실록(景宗實錄)』 1년(1721년) 8월20일

만약 왕권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상황이었다면 이정소의 상소는 역모 죄로 다스릴 만큼 중대 발언이었다. 그러나 경종은 노론 계열 대신들에게 의논해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이정소가 ‘후사 책봉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린 바로 그날 밤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이 노론의 대신들을 거느리고 일제히 궁궐로 들어와서 경종에게 입대를 청했다. 새벽 2시경에 두 정승과 노론 계열 대신 10여명이 시민당(時敏堂)에서 경종을 면대했다.

왜 노론은 밝은 날을 피한 채, 한 밤 중에 궁궐에 몰려와 임금에게 접견을 청하는 무리수를 두었던 것일까? 그 까닭은 오로지 소론의 반대 특히 우의정 조태구가 없는 자리에서 경종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도록 몰아세워 일거에 ‘왕세제 책봉’을 매듭지으려는 계획이 미리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영의정 김창집에 이어 판중추부사 조태채, 좌의정 이건명 등이 번갈아 가면서 경종에게 ‘빨리 후사(後嗣)를 정하라’고 종용했다.

경종은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집권당인 노론의 대신들이 한밤중에 모두 몰려와 청하는 ‘왕세제 책봉 요구’는 당시 경종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정치적 협박(?)이었다.

결국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가 다시 청하고 좌부승지 조영복이 “대신들과 여러 신하들의 말은 모두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한 것이니 속히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경종은 마지못해 허락한다고 답했다. 일당 독재를 향한 노론의 ‘권력 장악 프로젝트’의 첫 단계가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노론의 계획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경종이 결정을 번복하지 못하도록 당시 왕실의 가장 웃어른인 대비(大妃) 인원왕후(숙종의 계비) 김씨에게 수결을 받도록 청했다. 여기에는 소론의 반발과 저항을 물리칠 명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사간원 정언 이정소가 말한 조종(祖宗)의 영전(令典)이란 공정대왕(恭靖大王 : 정종) 때의 일을 가리킨 듯합니다. 전하께서는 위로 대비마마를 모시고 계시니 아뢰고 수필(手筆 : 수결)을 받은 다음에야 봉행하실 것입니다. 신들은 합문(閤門) 밖에 나가서 기다리겠습니다.”

동생인 태종 이방원을 왕세제(王世弟)로 삼은 정종 때의 사례를 거론하면서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의도가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는 것에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당시 대비 인원왕후는 이미 노론 대신들과 사전에 합의한 상태였지만 그러한 사실을 감추려는 듯 일부러 시간을 지체했다. 결과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김창집 등은 내관을 불러서 임금에게 빨리 나오도록 재촉했다.

새벽 누종(漏鍾)이 친 다음에야 경종은 김창집 등을 낙선당(樂善堂)으로 불러들여 면대했다.

먼저 김창집이 “벌써 대비마마께 아뢰셨습니까?”하고 묻자 경종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에 이건명이 나서서 “반드시 대비마마의 수찰(手札)이 있어야만 거행할 수 있습니다”고 거들었다. 그러자 경종은 책상 위를 가리키면서 “봉서(封書)는 여기에 있다”고 답했다.

김창집이 봉서를 받은 다음 뜯어보니 안에는 종이 두 장이 들어 있었다. 하나는 해서(楷書)로 ‘연잉군’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고, 다른 하나는 한글로 된 교서였다. 그곳에는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한 이유가 이렇게 적혀 있었다.

“효종대왕의 혈맥과 선대왕(숙종)의 골육으로는 다만 주상과 연잉군뿐이오. 어찌 딴 뜻이 있겠오? 나의 뜻은 이러하니 대신들에게 하교하심이 옳을 것이오.” 『경종실록(景宗實錄)』1년(1721년) 8월20일

이 교서를 읽어 보고 여러 신하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들이 계획한 대로 노론 당적의 왕세제(王世弟)가 탄생한 사실에 감격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훗날 경종의 독살과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조선왕조사 최고의 비극을 짊어질 노론 당적의 왕세제 연잉군이 탄생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때 연잉군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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