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孤山) 윤선도② 제주도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보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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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孤山) 윤선도② 제주도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보길도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10.22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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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⑲
▲ 보길도 전경. <완도군 홈페이지>

[한정주=역사평론가] 선조 시대 사림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분당(分黨)할 때 윤선도의 가문은 호남에서 몇 안 되는 동인(東人)이었다. 그래서 그의 가문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윤의중(윤선도의 할아버지), 이발(윤의중의 외조카), 정언신(윤선도의 사돈인 정세관의 조부) 등이 정여립 역모사건과 정개청 옥사사건에 연좌되어 희생당했다. 이들 사건은 서인이 동인을 탄압하고 참살한 일종의 사화(士禍)였다.

그런데 이들 사건 이후 다시 조정의 실권을 쥔 동인은 서인 세력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입장과 견해를 달리하면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갈라섰다. 이때 윤선도의 가문은 남인(南人)의 편에 서면서 호남 제일의 남인 명문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장악한 서인 세력은 윤선도를 집중적으로 견제했다. 윤선도는 의금부 도사, 안기찰방, 사포서 제조 등의 관직에 연이어 임명되었지만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들 관직은 사실상 조정 내에서 정치적 발언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라를 개혁하고 시무(時務)를 혁신할 큰 뜻을 품고 있었던 윤선도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42세가 되는 1628년(인조 6년) 마침내 큰 기회가 찾아왔다. 그해 3월 이조판서인 계곡(谿谷) 장유의 천거로 훗날 효종(孝宗)이 되는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이후 윤선도는 공조좌랑, 호조좌랑, 형조좌랑, 예조정랑 등에 제수되면서 인조(仁祖)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서인의 핵심 인물인 우의정 강석기가 지나치게 빨리 승진한다는 트집을 잡고 윤선도에 관한 유언비어를 퍼뜨려 모함하자 병을 이유로 관직을 모두 사임하고 낙향할 뜻을 품게 되었다. 이때가 1633년으로 윤선도의 나이 47세였다.

결국 윤선도는 다음해 외직인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당하고 만다. 성산현감으로 재직 중 양전(量田)에 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개혁할 상소문을 올렸지만 임금에게 보고조차 되지 않았다.

서인의 전횡과 농단에 더 이상 자신의 뜻을 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윤선도는 1635년(나이 49세) 겨울 끝내 성산현감 직을 사임하고 해남으로 낙향한다. 정치가이자 경세가(經世家)로서의 뜻을 접고 해남의 자연 속에서 시인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고산이라는 호처럼 외롭고 고단했던 그의 정치 인생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해남으로 낙향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땅 끝 해남에서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윤선도는 지방 사족(士族)들과 가복(家僕)들로 의병(義兵)을 구성해 배를 이끌고 강화도로 갔으나 이미 강화도는 함락되어 다시 남해로 뱃길을 돌려야 했다. 그러다가 임금이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제주도로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살기로 마음을 굳힌다.

그런데 제주도로 가던 도중 뜻밖에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보길도를 발견하고 그곳에 터를 잡아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붙이고 낙서재(樂書齋)를 지어 은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가 물러가자 조정의 서인 세력은 윤선도가 강화도까지 와서 한양을 지척에 두고서도 임금을 알현하지 않았다는 이른바 ‘불분문(不奔問: 달려와서 문안하지 않았다)’의 죄를 물어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형을 내렸다.

▲ 해남의 고산 윤선도 고택. <해남군 홈페이지>

1년 가까이 유배 생활을 한 윤선도는 1639년(나이 53세) 2월 유배지에서 풀려나 해남으로 돌아온다. 윤선도는 이때부터 왕자 시절 자신에게 학문을 배운 봉림대군이 새로이 임금으로 즉위한 지 3년이 되는 1652년(나이 66세)까지 무려 13년을 해남의 금쇄동(金鎖洞)과 보길도의 부용동(芙蓉洞)을 오가며 시인 묵객의 삶을 살았다.

이 기간 동안 윤선도는 ‘산중신곡(山中新曲)’ 속의 ‘오우가(五友歌)’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 우리 시조 문화의 최고 걸작들을 연이어 지었다. 정치에 끈을 끊자, ‘언어의 연금술사’이자 ‘자연미의 시인’ 윤선도가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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