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孤山) 윤선도③ 비운의 정치인과 최고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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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孤山) 윤선도③ 비운의 정치인과 최고의 시인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10.24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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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⑲
▲ 고산 윤선도

[한정주=역사평론가] 근기남인(近畿南人)의 영수로 윤선도와 동시대를 살았던 미수(眉叟) 허목(1595년∼1682년)은 윤선도 사후 ‘신도비(神道碑)’를 썼다.

‘해옹(海翁) 윤참의(尹參議) 비문(碑文)’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허목은 “공(公: 윤선도)이 바다로 들어간 이후 내가 호(號)를 해옹(海翁)이라고 붙였다. 일시(一時)에 모두 그렇게 불렀다. 간혹 고산선생(孤山先生)이라고도 하였다. 고산(孤山)은 한양 동쪽 교외 강가의 옛집에 있는 산이다”라고 밝혔다.

이 기록은 오늘날 우리들은 윤선도하면 당연히 ‘고산(孤山)’이라는 호를 자연스럽게 떠올리지만 실제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해옹(海翁)’으로 더 많이 불렸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허목이 말한 “윤선도가 바다로 들어간 이후”란 도대체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1637년 윤선도의 나이 51세에 인조가 청(淸)나라 군대에 굴욕적으로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등질 목적으로 제주도로 항해하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보길도에 매료돼 그곳에 터를 잡고 은거할 결심을 한 때다.

이때부터 윤선도는 임금의 부름을 받아 한양 혹은 양주의 고산(孤山)에 머물 때나 유배형에 처해졌을 때를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시간을 보길도에서 지냈다. 해남의 본가(本家)보다 보길도에 머문 시간이 더 많았고, 죽음을 맞이한 곳도 해남의 본가가 아니라 보길도 부용동(芙蓉洞)의 낙서재(樂書齋)였다. 중년 이후 윤선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다름 아닌 보길도였던 셈이다.

그곳은 윤선도의 문학에서도 큰 변곡점(變曲點)이었다. 조선의 강호미학(江湖美學)에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 받는 최고의 걸작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도 보길도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윤선도의 시문학이 비로소 만개(滿開)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어쨌든 1637년 강화도에서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가던 중 태풍을 만난 윤선도가 잠시 쉬어 갈 생각에 닻을 내린 곳은 황원포(黃原浦)라는 포구였다. 그런데 포구에서 멀리 보이는 산의 모양이 마치 연꽃을 포개놓은 듯 수려했다.

애초 이름이 없던 이 산에 윤선도는 연꽃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부용동(芙蓉洞)’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마침내 집터를 닦아 은둔 생활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윤선도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듯 순수하고 맑은 부용동의 비경(秘景) 앞에 완전히 매료당했다.

일찍이 도산에 마음을 빼앗긴 이황이 시흥(詩興)을 주체할 수 없어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지은 것처럼 보길도와 부용동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윤선도는 보길도의 앞바다인 황원포를 빌어 ‘황원잡영(黃原雜詠)’을 읊었다.

“누가 이처럼 질박하고 공교롭게 만들었을까 / 호탕하고 거리낌 없는 조화옹의 작품이겠지 / 옥(玉)으로 빚은 물통 나르는 폭포는 향기로운 안개를 뚫고 / 돌로 만든 항아리 차가운 연못은 푸른 하늘에 비치네 / 십 리의 봉래산은 하늘이 내린 복록 / 비로소 나의 도(道)가 아주 궁색하지 않다는 것을 아네 / 봉래산으로 잘못 알고 들어와서 홀로 진경(眞景)을 찾았으니 / 산과 계곡, 나무와 숲, 돌과 바위 맑고 기이해 하나하나 신비롭네 / 가파른 절벽은 천고(千古)의 뜻을 묵묵히 간직하고 / 깊은 숲은 사계절의 봄을 한가롭게 품었네 / 어찌 알겠는가 지금 바위 가운데 나그네가 / 다른 날 그림 속의 사람이 되지 않을 줄을 / 더러운 세상의 시끄럽고 떠들썩함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마는 / 발길 돌려 돌아갈 생각하니 신선들이 책망할까 두렵네 / 달팽이 집 같다고 그대들 웃지 말게 / 어느 곳을 둘러봐도 새로운 그림 이루었네 / 이미 장춘포(長春圃)를 얻었는데 / 어찌 불야성(不夜城)이 필요할까 / 우묵한 술통에는 옛 뜻이 머무르고 / 돌로 쌓은 방에는 그윽한 정취 유쾌하네 / 산이 오히려 낮아서 귀를 씻는 것보다 / 차라리 귀에 소리가 끊어지는 것이 낫겠네.” 『고산유고』, ‘황원잡영(黃原雜詠)’

윤선도는 가장 먼저 부용동에 수많은 책을 쌓아놓을 낙서재(樂書齋)를 짓고 우거(寓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천석실(洞天石室)과 세연정(洗然亭) 등 여러 건물을 차례차례 짓고 부용동 이곳저곳의 산천에 하나하나 이름까지 붙였다.

“한줌 크기 모옥(茅屋) 비록 낮지만 / 다섯 수레 가득 책은 많네 / 어찌 단지 나의 근심만 달래겠는가 / 나의 잘못도 고쳐주기를 바라네.” 『고산유고』, ‘낙서재(樂書齋)’

윤선도는 이 시에 스스로 주석을 달기를 “낙서재는 부용동 격자봉(格紫峯) 아래에 있다”고 적었다. 격자봉은 부용동 전체를 감싸고 있는 보길도의 주산(主山)인데, 윤선도는 이 격자봉 바로 아래에 자신의 거처이자 서재(書齋)이기도 했던 낙서재를 지었던 것이다.

“높은 파도 큰 물결 한 가운데에 / 우뚝 선 채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네 / 자미궁(紫微宮)에 나아갈 마음이 있다면 / 먼저 부끄러워하고 또한 바르게 행해야지.” 『고산유고』, ‘격자봉(格紫峯)’

또한 동천석실은 부용동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부용동의 아름다운 풍광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윤선도는 자연 그대로의 기암괴석에 샘과 정자 그리고 연못을 고루 갖추어 놓고 스스로 ‘신선이 사는 곳’이라고 부르며 썩어 빠진 더러운 권력과 번다한 세상사로부터 벗어나 유유자적하는 은둔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수레에는 소동파의 시 싣고 / 집에는 주문공(周文公)의 글 세웠지 / 어찌 여섯 겹의 문이 있겠는가 / 뜰에는 샘과 정자와 연못을 갖췄네.”

-『고산유고』, ‘석실(石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보길도 부용동에서 신선처럼 살려고 했던 윤선도의 소박한 꿈은 불과 1년 만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1638년 봄 조정에서 ‘불분문(不奔問)’의 죄목을 들어 윤선도에게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형을 내렸기 때문이다.

▲ 세연정 주변 외원의 모습을 진경산수화적 기법으로 그린 ‘세연정 외원도’(김영환, 2014). 태풍을 만난 윤선도가 잠시 쉬어 갈 생각에 닻을 내린 포구 황원포(黃原浦)가 표시돼 있다. <문화유산채널 홈페이지>

다행히 다음해 2월 유배지에서 풀려나 해남 본가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세상사에 대한 미련은 물론 집안일을 돌볼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집안일을 큰아들 윤인미에게 맡긴 윤선도는 본가 근처 해남현(海南縣) 남쪽에서 스스로 “귀신이 다듬고 하늘이 숨긴 비경”이라고 감탄한 금쇄동(金鎖洞)을 발견하고 그곳에 산중 별장을 짓고 우거처(寓居處)로 삼았다.

이때부터 1652년 나이 66세에 왕자 시절 자신의 제자였던 효종이 부를 때까지 윤선도는 금쇄동과 보길도의 부용동을 오가며 한시와 시조의 수많은 걸작들을 남겼다. 그들 시 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윤선도의 나이 65세(1651년) 때 지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였다.

‘어부사시사’가 없었다면 윤선도도 없었고, 윤선도가 없었다면 ‘어부사시사’도 없었다고 할 정도로 이 시조는 우리 문학사에 거대한 족적(足跡)을 남겼다. 특히 ‘어부사시사’는 해옹(海翁)이라는 그의 호가 갖는 이미지와 너무나도 잘 맞아 떨어지는 탁월한 작품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어부사시사’는 윤선도가 새롭게 창작한 작품이 아니다. ‘어부사(漁父詞)’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시조의 한 장르였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때부터 작자 미상의 ‘어부사’가 전해져 왔고, 이것을 농암(聾巖) 이현보가 ‘어부가(漁父歌)’로 개작했고, 또한 이황은 이것을 좋아해 즐겨 읽고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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