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고 말하고, 드러내지 않고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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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고 말하고, 드러내지 않고 드러낸다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20.03.26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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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② 가을 등불 아래 세찬 비 내리고(秋燈急雨七絶)

서늘한 가을밤 등불 붉게 타오르고        涼宵顧影剔燈紅
‘검록’과 ‘성경’은 시렁에 가득하구나 劍錄星經揷架充
바다에 조각배 띄울 마음 문득 일어나니   頓有扁舟浮海想
가을 서재 홀연히 빗소리 속에 둥둥 뜨네  秋齋忽泛雨聲中
-『한객건연집』(재번역)

[한정주=역사평론가] “시는 말해선 안 되고 보여주어야 한다.”(안대회, 『궁극의 시학』, 문학동네, 2013. 21쪽)

무슨 뜻일까?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것, 표현하지 않으면서 표현하는 것, 보여주지 않으면서 보여주는 것, 드러내지 않으면서 드러내는 것, 묘사하지 않으면서 묘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나올까? ‘절제’와 ‘여백’에서 나온다.

작자는 깊어가는 가을밤 세차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느낀 외롭고 쓸쓸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늘한 가을밤 등불’의 시어(詩語)를 통해 독자는 그 감정을 공감하고 공유한다.

작자는 호방하고 장대한 기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 역대 제왕과 인물의 도검(刀劍)에 대해 서술한 ‘검록’과 중국 고대 천문에 관해 기록한 ‘성경(星經)’을 통해 독자는 그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더욱이 자신이 앉아 있는 서재를 조각배에 그리고 세상을 드넓은 바다에 비유해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조각배일지라도 자유롭고 활달하게 바다에서 노닐고 싶은 심정을 묘사한 시구(詩句)를 통해 그 생각의 경지가 비범한 사람임을 깨닫는다.

작자는 자신의 감정과 기운과 생각을 결코 말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지만 독자는 그 감정과 기운과 생각을 느끼고 읽을 수 있다.

절제와 여백의 미학이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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