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生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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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生物)이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20.04.06 0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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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④ 한 해에 붙여

가을 기운 참으로 구슬퍼                          秋之爲氣正悲哉
한가한 날마다 층계 석대 돌고 도네                暇日盤桓疊石臺
어린아이의 희롱, 처녀의 부끄러움 어찌 높다 하랴 兒弄女羞才詎峻
귤의 껍질, 매미의 허물도 거처하기에 넓다 하리   橘皮蟬殼室堪恢
백문이 바로 홍문과 가까워                        白門正與紅門近
자그마한 이덕무 때때로 수척한 이덕무 찾아오네   短李時尋瘦李來
성벽이 어둡고 어리석어 쓰일 데 없으니            性癖䟱迂非適用
쓸모없는 재목으로 영화로움도 없고 욕됨도 없네   無榮無辱散樗材
『영처시고 2』(재번역)

[한정주=역사평론가] 이덕무를 몰라도 시를 보면 이덕무의 사람됨은 짐작할 수 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 부귀, 영화, 출세, 명예를 좇으면서 욕된 삶을 살기보다는 차라리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맑고 깨끗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이덕무의 뜻과 기운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자는 작자가 글에 담은 뜻과 기운을 그대로 짐작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전혀 다르게 짐작하기도 한다.

이덕무의 삶을 잘 모르는 사람은 간혹 내면 깊숙이 감춘 부귀, 영화, 출세, 명예에 대한 타오르는 욕망을 드러내는 시로 읽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고 위태로운 일이다.

하지만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이상 자신의 글이 의도와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사실을 피해갈 재간은 없다.

그것은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는 글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글을 써서 먹고사는 작가인 나는 ‘나와 글의 운명’을 이렇게 생각한다.

“글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生物)이다. 언제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나의 글을 누군가 읽는 순간 그 글은 생명력을 갖게 된다. 생명력을 갖게 된 글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아 움직인다. 나의 글은 나의 수명보다 더 길고 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다. 내가 사라져도 나의 글은 살아남아 떠돌 것이다. 비록 나에게서 나온 글이지만 누군가 읽는 순간 그 글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게 된다. 어떻게 글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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