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승 나의 벗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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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나의 벗 박지원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20.06.22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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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㉕ 연암 박지원의 ‘어촌쇄망도(漁村曬網圖)’에 쓰다
연암 박지원의 초상화.
연암 박지원의 초상화.

사람 기척 없고 물결 소리 맑고 시원한데            了無人響翠泠然
낮 길어 몽롱하고 버들개지 날아다녀 눈빛 흐리네    永晝矇矓柳絮顚
복숭아꽃 먹어 삼킨 고기 모두 깨어나니             唼呷桃花魚盡悟
볕에 말린 고기 그물 연기처럼 출렁대네             漁罾閒曬漾如煙
『아정유고 2』 (재번역)

개성 만월대(滿月臺)에서 금천(金川)으로 가는 박지원·백동수와 이별하며

번화한 옛 도읍 기름진 풀밭으로 변했으니           繁華只博草油油
쏜살같은 세월 오백 년이 흘렀네                    彈指之間五百秋
부서진 벽돌 조각 줍고 가죽신 소리 상상하니        閒拾剩磚鞾響憶
무너진 주춧돌 미루어 기둥 둘레 헤아리네           細推崩礎柱圍求
구름 걷히고 물 흐르니 영웅의 기상이요             雲歸水逝英䧺氣
꽃 지고 새 우니 나그네의 시름이네                 花落鳥啼旅客愁
어찌 헤아리랴 흥망의 이치 나를 괴롭혀             豈謂興亡干我甚
이별하는 심정 눈물 줄줄 흐를 줄을                 離情仍惹淚潸流
『아정유고 2』 (재번역)

[한정주=역사평론가] 어렸을 때부터 오직 독서와 시문(詩文)밖에 몰랐던 서자 출신의 가난한 이덕무는 어떻게 훗날 자신의 재주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그 힘은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넘어선 사회적 네트워크, 즉 사회적 교유 관계에 있었다.

마포와 남산을 옮겨 가며 살던 이덕무는 나이 26세 때인 1766년(영조 42년) 5월 지금의 인사동에 해당하는 관인방 대사동으로 이사를 왔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홍대용, 박지원,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금, 이만중, 이재성 등과 교류하고 교유했다.

이덕무는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사상적으로는 북학파(北學)의 일원이 되고 문학적으로는 백탑파의 일원이 되고 관료로서는 규장각 4검서관 중 한 사람이 되어 18세기 조선의 문예부흥을 찬란히 빛낸 인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덕무가 이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단연 박지원이었다. 가난하고 이름 없는 선비 시절부터 이덕무에게 박지원은 최고의 지지자이자 후견인이었다.

시와 문장이 괴상하고 비루하다는 세간의 혹평과 비난에 이덕무가 괴로워할 때도 그 시문의 기이함과 새로움을 깊게 이해하고 가장 앞장서서 지지하고 옹호해준 사람은 박지원이었다.

이덕무에게 박지원은 멘토이자 롤모델이라는 점에서는 스승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주고 진실로 알아준다는 점에서는 벗이었다. 만약 박지원이 이해하고 알아주고 지지하고 변호해주지 않았다면 이덕무가 가난의 설움과 신분 차별의 굴레를 견뎌내면서 자신의 삶과 꿈을 개척해나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이덕무에 대한 박지원의 마음은 다음과 같은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때로는 해가 저물도록 먹을거리를 마련하지 못한 적도 있고, 때로는 추운 겨울인데도 방구들을 덥힐 불을 때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덕무는 젊은 시절부터 가난을 편안히 여겼고, 벼슬길에 나간 후에도 거처와 의복이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평생 ‘기(飢: 굶주림)’와 ‘한(寒: 추위)’ 두 글자를 결코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임금을 가까이 모시고 총애를 받았지만 쓸쓸한 오두막집에 살며 빈천(貧賤)을 감내할망정 권세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부귀와 권력을 탐하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는 내실을 갖추었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지내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지녔다.”

진실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박지원을 만난 이덕무의 삶은 최고의 행복을 누린 삶이었다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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