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봄 홀로 술 마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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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 홀로 술 마시며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20.07.09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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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㉙ 담담함과 읊조림

쏜살같은 세월 술잔 속 들어오니                    鼎鼎年華入酒卮
처음 호탕하다가 점차 별 일 없어졌네             初因莽宕轉無爲
육신 은둔 꿈꾸면서 무엇 하러 글은 저술하랴   身將隱矣書何著
학문 이루지 못해 운명 비로소 알겠네             學未成焉命始知
모든 것 오활한 사람 지금 시대 나뿐               通體迂惟當世我
마음으로 사귈 사람 일생에 누구인가              寸心交是一生誰
많은 거짓 적은 진실 익히 겪었으니                贋多眞少經來慣
이제 두 눈 나 홀로 간직하네                         雙眼如今獨自持
『아정유고 2』 (재번역)

조롱에 해명하다

큰 계책 억지로 이루기 어려워                      大黠知難强
차라리 철저히 진실 닦으려네                       寧修徹底眞
깨끗한 이름 예전 그대로 나인데                   淨名吾古我
헐뜯고 욕하는 사람 누구인가                       赤口彼何人
비방과 조롱 경박한 습관이니                       好惹澆澆習
담박한 정신 괴롭힐 뿐이네                          要煩澹泊神
세상 풍문 두 귀에 스치지만                         風痕從兩耳
갈수록 고고한 하늘만 믿을 뿐                      去去信高旻
『아정유고 1』 (재번역)

[한정주=역사평론가] 홀로 담담하게 읊조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시다.

마음에 울화가 쌓여 있으면 대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 울화를 터뜨려 울부짖거나 분노하던지 혹은 담담하게 울화를 삭이거나 묵묵하게 받아들이든지.

하지만 담담하게 삭이거나 묵묵하게 받아들인다 해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가 있다. 대개 이 순간 중얼거림, 투덜거림, 푸념, 하소연, 읊조림 등이 나온다.

그래서일까? 가슴에 울화가 가득 쌓인 시인은 읊조리듯 시를 쓴다. 이때 시인이 선택하게 되는 시적 묘사법은 ‘담담하게 읊조리는 것’이다.

시의 미학은 절제와 여백, 압축과 생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울부짖거나 분노하기보다는 담담하게 읊조리면 읊조릴수록 독자는 시인의 내면에 겹겹이 쌓여 있는 무엇인가를 읽게 된다.

담담함과 읊조림 속에 감춰져 있는 시인의 내면을 읽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시인은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말할 때보다 더 많은 말을 전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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