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같은 시, 시 같은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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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같은 시, 시 같은 산문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20.07.13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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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㉚ 수수를 꺾어 빗자루를 매며

4월에 조촌(潮村)에 갔다. 수수 낟알이 겹겹이 달려있는데 검으면서 붉은빛이 번득였다.

일가 사람 화중(和仲)이 “빗자루를 만들기에 좋다. 다른 수수는 억세고 오래가지 못한다. 말총 같지 않다. 그런데 이 수수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내게 세 움큼을 건네주었다.

집에 돌아와 돌담 그늘에 심었다. 6〜7월이 되자 헌칠하게 자라서 단단해졌다. 8월에 접어들자 질겨져서 과연 빗자루를 맬 만하였다.

높고 높은 수수 돌담 그늘                      峩峩薥黍石垣陰
8월 되자 붉은 줄기 두 길 자랐네               八月朱莖邁二尋
총채처럼 긴 빗자루 매고 나서                  長帚縛來如尾穗
낟알 털고 모아 새밥 주었네                    散它餘粒施飢禽
『아정유고 1』 (재번역)

[한정주=역사평론가] 이덕무는 시를 쓰듯이 산문을 쓰고, 산문을 쓰듯이 시를 썼다. 그래서 이덕무의 시 중에는 산문 같은 시가 많고 또한 산문 중에는 시 같은 산문이 많다.

더욱이 마치 동일한 장면과 풍경을 묘사한 듯 서로 꼭 빼닮은 시와 산문도 많다.

산문 같은 시의 대표적인 경우가 위의 시라면 시 같은 산문의 대표적인 경우는 이덕무의 산문집인 『선귤당농소』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글이다.

“봄 산은 신선하고 산뜻하다. 여름 산은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가을 산은 여위어 수척하다. 겨울 산은 차갑고 싸늘하다.”

이덕무는 앞서 소개한 영처(嬰處)의 미학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위적으로 다듬지 않고 가식적으로 꾸미지 않은 진솔한 글쓰기를 추구했다.

진솔한 글쓰기는 시라고 다르지 않고, 산문이라고 다르지 않다. 이덕무의 시와 산문은 모두 ‘진솔한 글쓰기’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다른 가지였다.

진솔한 글쓰기는 “오직 감정, 생각, 기운, 뜻, 정신을 드러낼 뿐 형식과 문체에 얽매이거나 구속당하지 않는다”는 이덕무의 메시지에 잘 담겨 있다. 때문에 시 같은 산문 또는 산문 같은 시 혹은 서로 꼭 빼닮은 시와 산문이 나올 수 있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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