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밤 마음 가는 대로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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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밤 마음 가는 대로 짓다”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20.08.13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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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㊳ 이덕무와 달

하는 일 없이 고요한 가운데                靜中無所事
난간에 몸 기대 먼 곳 바라보네             眺望憑闌干
들 빛 가을 오자 서늘하고                  野色兼秋冷
강물 소리 밤 되자 차갑네                  江聲入夜寒
솔바람 베갯머리에 불어오고                松風來枕上
담쟁이덩굴 사이 달 처마 끝에 걸렸네       蘿月掛簷端
벗 더불어 밤 깊도록 이야기하며            與友深宵語
가슴 열고 실컷 즐거움 만끽하네            論懷須盡歡
『영처시고 1』 (재번역)

달밤에 마음 내키는 대로 짓다

푸른 하늘 씻은 듯 은하수 흐르니           碧天如洗絳河流
담담루(淡淡樓) 올라 달구경하네            玩月聊登淡淡樓
바람과 맑은 빛 어울려 단소 소리 처량하네  風伴淸光凄短笛
이슬에 흰 그림자 엉겨 빈 배 비치네        露兼皎影映虛舟
구름산 적막하니 동틀 무렵 차갑고          雲山寂歷當寒曉
물안개 아득하니 가을 녘 순박하네          煙水蒼茫接素秋
가슴 헤치고 바라보니 시흥(詩興) 솟구치고  憑望披襟詩興逸
금빛 물결 솟아나 긴 물가 둘러샀네         金波滾滾繞長洲
『영처시고 1』 (재번역)

한가위 보름달

한가위 구름 길 깨끗하니                   中秋雲路淨
둥글둥글 휘영청 밝은 바퀴 달              皎皎一輪圓
지극한 흥취 붓대에 실을 뿐                逸興只輸筆
탐내고 바라본들 돈 한 푼 들지 않네        耽看不用錢
발 뚫은 빛 문득 부수어지고                穿簾光瑣碎
창에 들어온 그림자 어여쁘고 곱네          入戶影姸娟
보고 또 보고 즐기고 다시 즐기니           遮莫須臾玩
한 해 지나야만 이 밤이네                  今宵隔一年
『영처시고 1』 (재번역)

내각의 달밤

벗 그리워하는 내각(內閣: 규장각)의 밤      內閣懷朋夜
고향 그리워하는 남관(南館: 사신관)의 새벽  南館憶鄕晨
오직 하늘 한복판 저 달                     惟有中天月
내각 사람 남관 사람 함께 환히 비추네       同照兩地人
『아정유고 4』

[한정주=역사평론가] 이덕무는 옛사람이나 다른 사람의 글을 답습하거나 흉내내거나 모방한 글을 가장 혐오했다. 반면 자기 자신의 글을 쓰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자기 자신의 글을 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감정·마음·뜻·기운·생각·느낌 등을 거짓으로 꾸미거나 인위적으로 다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달을 소재로 하거나 제목으로 하는 시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만약 달을 소재로 하거나 제목으로 하는 시를 짓는다면 그것은 옛사람이나 다른 사람의 행위를 흉내 내거나 답습하거나 모방하는 행위다.

하지만 만약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감정·마음·뜻·기운·생각·느낌 등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시를 짓는다면 이미 존재하는 수천 수만 편의 시와는 전혀 다른 시와 나오게 될 것이다.

옛사람이나 다른 사람이 이미 많이 지어놓은 소재와 제목의 시라고 할지라도 지금 시를 짓는 사람이 마주하는 상황과 대상, 느끼는 감정과 생각, 풍경과 사물의 정취는 옛사람이나 다른 사람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새롭고 신선한 시를 얼마든지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제 본 달과 오늘 본 달은 다르다. 어제의 내 감정과 오늘의 내 감정은 다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본 달과 장성해서 본 달은 다르다. 어렸을 때 나는 장성한 나와 다르고, 장성한 나는 어렸을 때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녁에 본 달과 새벽에 본 달은 다르다. 저녁의 내 마음과 새벽의 내 마음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봄에 본 달과 가을에 본 달은 다르다. 봄에 본 달의 느낌과 가을에 본 달의 느낌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짜 시, 살아 있는 시, 참된 시, 참신한 시, 독창적인 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감정·마음·뜻·기운·생각·느낌 등을 표현하고 묘사해야 나온다.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감정과 마음과 뜻과 기운과 생각과 느낌은 결코 둘 이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덕무가 ‘달’을 소재로 한 시를 그토록 많이 지었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마음·뜻·기운·생각·느낌이 똑같은 시가 단 한 편도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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