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표교에서 짓다
상태바
수표교에서 짓다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0.08.21 07: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덕무 詩의 온도]㊵ 청계천 수표교 풍경
조선후기 화원화가인 신원 이의양의 '춘소아집'(봄밤의 아름다운 모임).
조선후기 화원화가인 신원 이의양의 '춘소아집'(봄밤의 아름다운 모임).

연지 빛 햇살에 담장 붉어지고                            臙脂日脚女墻紅
청문(靑門: 동대문) 나무 끝에 바람 불어오네             剪剪靑門樹末風
성 밑 바로 바라보니 수문(水門) 비스듬히 비추고         直望城根橫水鑰
철창에는 또렷이 차디찬 허공이 내다보이네               鐵窓的歷漏寒空

모자에 바람 스며 술기운 깨는데                         煖帽風穿酒力消
구불구불 하얀 그림자 바로 긴 다리구나                  迤迤白影是長橋
홀연히 싸늘하게 물가 기운 일어나니                     凄迷忽作汀洲勢
시든 버들에 안개 서리 가깝고도 먼 것 같네              衰柳煙霜近似遙

긴 행랑 등불 양쪽에서 비추는데                         燈火脩廊射兩邊
어둠 속에 홍교 걷자니 날이 싸늘하구나                  虹橋暝踏一泠然
원컨대 서자호의 연꽃 옮겨 와서                         願移西子湖中藕
아침은 붉은 노을 저녁은 푸른 안개 덮였으면             朝冪朱霞夕綠煙
『아정유고 2』 (재번역)

[한정주=고전연구가] 이덕무와 그 벗들의 시와 글을 읽다보면 마치 풍속화를 보는 것처럼 18세기 한양 도성 안 삶의 풍경을 상상해볼 수 있다.

특히 북촌, 인사동, 백탑, 종로, 청계천, 남산 일대는 그들이 어울려 살며 거닐고 노닐던 특별한 공간이었다.

만약 18세기 사람들에게 청계천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느냐고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술집’이라고 답변할 것이다. 박제가는 당시 청계천의 술집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오리 거위 한가로이 제멋대로 쪼아대고 / 물가 주막 술지게미 산더미처럼 쌓여 있네.”

이덕무는 벗들과 어울려 청계천 주변 술집을 배회하다가 다리 난간에 기대어 시를 읊조리는 생활을 무척 사랑했다.

여기 ‘수표교에서 짓다’는 시를 통해서도 이덕무와 그 벗들의 삶을 엿볼 수 있지만 박지원이 남긴 ‘취답운종교기(醉踏雲從橋記: 술에 취해 운종교를 거닌 기록)’라는 글을 읽어보면 더욱 생생한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이덕무는 박지원을 비롯해 여러 벗들과 함께 술에 취해 운종가(종로)로 나가 종각 아래서 달빛을 밟으며 거닐다가 운종교(지금의 종각 남쪽 광교 사거리에 있던 광통교) 난간에 기대서서 옛일을 떠올리며 즐거워한다. 그리고 청계천을 따라 동대문 방향으로 가다가 수표교에 당도해 다리 위에 줄지어 앉아 달빛과 별빛을 감상한다.

이슬이 짙게 내려 옷과 갓이 다 젖는 것도 잊은 채 맹꽁이 소리와 매미 소리와 닭 울음소리를 들으며 사람 사는 세상의 다사다난함을 회고한다.

참으로 운치 있는 청계천의 밤 풍경이지 않은가! 인생에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과연 몇 번이나 있을 수 있을까? 어찌 시흥이 오르지 않을 수 있으며, 어떻게 시를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추위를 피하려 눌러쓴 모자로 바람이 스며들어 술기운이 달아나니 불현듯 감흥이 일어난다. 물속 다리 그림자가 하얗게 드러나고 싸늘한 물가 기운에 수표교를 감싼 시든 버들과 안개 서리가 가까운 듯 먼 듯 다가온다.

수표교 양쪽 긴 행랑 불빛, 무지개 모양 다리 위 어둠, 싸늘한 밤공기, 붉은 노을과 푸른 안개가 대비를 이루면서 이덕무의 시흥과 상상을 강렬하게 자극한다.

그 순간 이덕무가 포착한 시적 언어는 청계천의 밤 풍경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한 편의 걸작시를 토해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