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철살인의 미학…한시의 궁극적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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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철살인의 미학…한시의 궁극적 경지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1.03.22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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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65) 청음루 저녁 풍경

서늘한 청음루 앉아 있기 싫은데              靑飮樓涼讌坐嫌
이웃집 기왓골 어둠 깔리네                    漸看隣瓦暝來黔
저녁 장식한 별 흐르는 듯 뿌린 듯하고       淋漓瀾漫星鋪夕
시들고 말라 축 처진 나무 더위 먹었네       憔悴支離樹歷炎
옷은 헐렁 볼은 홀쭉 예전처럼 수척하지만   衣縐頰稜依例瘦
거미줄 박 덩굴 가냘프고 가늘어              蛛絲匏蔓盡情纖
오죽(烏竹) 퉁소 둥글둥글 뚫어진 구멍       簫穿烏竹團團孔
가을 소리 연주하고파 한 번 짚어 보네       欲奏秋聲試一拈
『아정유고 1』

[한정주=고전연구가] 한시의 미학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촌철살인의 미학’이다.

시적 대상 혹은 시적 존재를 마주하는 찰나의 순간 포착되는 감정과 떠오르는 생각을 한 마디의 시어 혹은 한 구절의 시구에 담는 것이야말로 한시의 아름다움 중 최상의 아름다움이다.

서서히 깔려오는 어둠, 뿌려놓은 듯 하늘을 수놓고 있는 별, 더위에 시달린 듯 축 늘어져 있는 나무, 실처럼 가늘게 뻗어있는 거미줄과 박덩굴이 처량하고 쓸쓸한 가을 정취를 예감케 한다.

처량하고 쓸쓸한 가을의 정취를 느낀 바로 그 순간 이덕무의 감각과 감성은 가을밤의 기운 한복판을 꿰뚫는 청량한 퉁소 소리를 떠올린다.

가을밤의 정취와 기운을 ‘퉁소 소리’로 포착하는 시적 흥취야말로 참으로 조선 사람답지 않은가.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퉁소 소리’에서 가을밤의 정취와 기운을 공감하고 교감할 수 있다.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을밤 퉁소 소리에 추억에 빠지고 회한에 젖고 영혼을 적신다.

가을밤 퉁소 소리에 배어 있는 고즈넉함, 처량함, 애달음, 구슬픔, 애끓음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가을의 정취와 기운을 ‘퉁소’라는 한 마디 시어에 모두 담은 이덕무의 시적 감각과 감성이야말로 한시 미학의 궁극적 경지인 ‘촌철살인의 미학’이 아니고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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