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변 ‘백사청송’의 활터…하동 하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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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변 ‘백사청송’의 활터…하동 하상정
  • 한정곤 기자
  • 승인 2021.05.10 1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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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 가는 길]⑫ 140년 역사 전해줄 사정·현판은 불과 5년 남짓한 세월만 간직
하동송림의 하상정 정자. [사진=안한진]

구름 한 점 없이 따사로운 햇살이 무성한 나뭇잎을 피해 차창 안으로 파고든다. 창문 밖으로 내민 손등에도 가시 돋친 한겨울 강바람을 밀어낸 부드러운 봄바람이 부딪힌다. 강 가운데에서는 무엇을 잡는지 조그만 배 한 척이 꿈쩍도 하지 않고 나이 지긋한 어부만 부산하게 허리를 굽혔다 편다.

하늘을 덮은 벚나무가 길가 양쪽으로 길게 도열한 국도 19번은 섬진강 물길을 따라 나란히 달린다. 매년 초봄이면 나무마다 송이송이 피어나는 벚꽃이 터널을 이루고, 이따금 바람이라도 불게 되면 흩날리는 꽃잎이 강으로 몸을 던지는 장관은 지금 당장 볼 수 없지만 한 편의 영화처럼 눈앞에 그려진다.

시인 고규태도 비슷한 광경을 보았을까. 시인은 떨어지는 꽃잎을 삼키지 않고 먼 길을 함께 가는 강의 포용력을 노래했다.

나는 강이 되리니
그댄 꽃이 되거라
그대 멀리 흘러가고 싶을 땐
그대 온몸 띄워 데려가리라
멀리 멀리 바다에 이를 때까지

푸르른 강이여 붉은 꽃이여
너와 나 우린 이렇게
이렇게 살아가리라

나는 강이 되리니
그댄 꽃이 되거라
그대 정녕 피어나고 싶을 땐
그대 뿌리 깊이 적셔주리라
정녕 정녕 꽃잎이 열릴 때까지

푸르른 강이여 붉은 꽃이여
너와 나 우린 이렇게
이렇게 살아가리라

힘없고 나약한 존재를 무너뜨리는 폭력성을 거부하고 오히려 보듬고 보살피는 강과 같은 공동체를 시인은 꿈꿨을 것이다. “푸른 하늘 / 그 아래 청산 / 강이 있어 바라보고 / 그 강언덕 산자락에 / 사람들이 모여 / 물 나고 빛 좋은 곳 터를 잡아 / 영차영차 집을 짓고 / 힘써 논과 밭을 만들고 / 철 따라 꽃 피고 지고 / 시뿌려 거두는 것같이 / 자식들을 늘려 / 동네를 이루고 살았으니 / 그게 몸과 마음 둘 땅이었더라”던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 연작시 ‘자연부락’이 그런 공동체가 아닐까.

◇ 송림 속 덩그러니 선 정자(亭子)
그렇게 그렇게 꽃잎을 띄워 태운 섬진강이 바다에 이르기 직전 닿는 땅이 하동이다. 북쪽의 지리산과 서쪽의 백운산이 우뚝 솟아 만든 계곡이 한려수도로 굽이쳐 흐르면서 하동포구 팔십리가 형성된 곳이다.

<드론촬영=안한진>

하동읍내로 들어서자 강 건너 광양을 연결하는 섬진교 옆으로 거대한 솔숲이 반긴다. 당초 1500여 그루였다는 솔숲은 260여년의 세월을 견딘 노송과 후계목 등 900여 그루가 또 다른 숲을 이루고 있다. 과거 아낙네들이 화전놀이를 하는 장소였다는 하동송림이다. 조선 영조21년(1745년) 당시 도호부사 전천상이 광양만의 해풍과 섬진강의 모래바람의 피해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송림 앞으로는 드넓은 섬진강 백사장이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가 펼쳐진다. 하동이 자랑하는 ‘백사청송(白沙靑松)’을 이렇게 친견하게 된다.

천연기념물 제445호로 지정된 송림 안에는 정자(亭子)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다. 노송이 주변을 에워싸고 사람 발길이 없어 얼핏 지붕만 겨우 살아남은 폐가(廢家)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금은 하동읍 신기리 하수종말처리장 옆으로 옮겨간 하상정(河上亭)의 옛 사정(射亭) 건물이다. 송림 속에 왜 이 같은 건물이 들어섰는지 유래나 이력을 설명하는 안내판은 없다. 하동송림 옆 주차장 입구에 ‘하동도호부사 전천상 기적비’가 검은색 대리석으로 웅장하게 서 있지만 하상정에 대한 언급은 빠졌다.

<드론촬영=안한진>

1999년 발간된 『경남궁도사』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하동읍내에 ‘강무정(講武亭)이 있으니 이는 곧 사정(射亭)이다’는 기록이 있으며 1880년(고종17년) 이 강무정에 한량(閑良)들이 모여 하동군 하동읍 광평리 443의 9번지에 사정을 개설하고 하상정이라 이름하여 현판하다”고 적고 있다.

1989년 하동읍이 발간한 『하동읍50년사』에서도 동국여지승람이라는 출처는 빠졌지만 “강무정이 송림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터[址]만 남아 옛날 무술을 강구(講究)하던 여운만 남는다”고 소개한다.

건립 시기는 특정할 수 없지만 오래 전부터 송림에 있었던 강무정의 맥을 하상정이 잇고 있다는 소개와 달리 강무정의 실체는 확인되지 않는다. 때문에 신기리 하상정에 걸려있는 ‘하상정 역혁기’ 편액에는 시초를 1880년으로 잡는다.

하상정 연혁기. [사진=한정곤 기자]

“조선 영조21년(1745년) 도호부사 전천상이 광평리에 방풍림으로 조성한 송림이 울창하여 고종17년(1880년) 김태익·여경규·신사영·이인무·정혼기·김재완·신무열 등 무관 출신들과 금신(衿紳)들이 구 강무정에 연유하여 사정을 개창(開創)하였으니 이것이 하상정의 시초이다.”

◇ 사진으로만 확인되는 옛 사정(射亭)들
송림 안의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건물로 사방이 트인 누대(樓臺) 형태를 갖췄지만 신발을 벗고 올라가 쉴 수 있도록 낮게 마루를 깔았다. 송림을 찾은 시민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정자를 사정 건물로 불러도 좋은지, 용도를 규정하는 데 있어서는 난감함이 앞선다. 옛 하상정 터에 세워진 정자로 ‘하상정’ 현판까지 달고 있지만 과거에는 물론 현재까지도 단 한 차례의 활쏘기를 하지 않은, 즉 사정으로서의 역할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옛 활터 자리에 옛 사정과 비슷한 형태의 건물을 세워놓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현재 송림 내 하상정 건물은 사실 2017년 1월 준공됐다. 하동향교 전교 정한효가 작성한 ‘하상정 중건 상량문’에는 2016년 윤상기 하동군수가 정자가 썩고 퇴락해 해체하고 중건하기 위해 긴급 발의해 상량한다고 적고 있다. 다만 준공 당시 사진에는 해체한 이후 수리하거나 고쳐 지은 중건 수준이 아니라 신축 장면이 담겨 있다.

1968년 하상정 전경. [사진=신라 명승 고적 관광 안내-하동편]

원래 송림에 있었던 하상정은 1968년 촬영한 사진이 가장 오래된 모습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건물로 내림마루에서 추녀마루로 흐르는 경사가 급하고 마루도 지면과 상당 부분 떨어져 있다. 특히 벽으로 사방을 둘렀고 뒤쪽 두 칸에는 창을 달았으며 왼쪽 한 칸에 여닫이문이 달려있어 궁방으로 사용했을 방이 있다.

이후 촬영됐을 『경남궁도사』에 게재된 사진에서는 내부의 일부분도 엿볼 수 있다. 하상정 현판과 하동군궁도협회 현판이 각각 세로와 가로로 내걸린 사정 안에는 각종 대회 우승상장이 걸려있고 우승기와 책상 등 집기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대에는 햇볕을 가리고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차양 시설도 갖춰 사정 전면을 가리고 있다.

차양이 설치된 하상정 전경. [사진=경남궁도사]

이어 2011년 6월17일 촬영한 사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목조건물로 확장돼 모습을 바꾸었다. 홑처마 팔작지붕의 내림마루에서 추녀마루로 흐르는 경사가 완만하고 마루바닥도 지면과도 거의 맞닿았다. 왼쪽 한 칸의 방이 사라졌고 사방이 트인 누대 형태로 서양식 문양의 난간까지 설치돼 있어 이전 사정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하상정이 수차례 중수와 재건을 되풀이하면서 이미 신축 수준의 중수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2011년 하상정 전경.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실제 하상정은 창건 이후 갑오경장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원들의 활쏘기가 중단됐고 사정도 허물어졌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 사원들이 다시 활터로 모여들었고 1953년 전통문화유산을 이어가야 한다는 비등한 여론으로 사정이 중수되고 활터도 재건됐다. 1975년에는 하동군의 지원을 받아 옥종면 윌횡리 소재 진양 하씨 재실의 기와와 목재를 매입해 중수했는가 하면 1980년과 1994년에도 각각 하동군과 경상남도의 지원을 받아 또 노후 사정의 내부와 외부를 전면 수리하는 중수가 진행됐다. 이처럼 여러 차례 중수가 되풀이되면서 본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정의 외형이 갖추어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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