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 경희궁터 변화과정 조명…신문로2가 역사 보고서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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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경희궁터 변화과정 조명…신문로2가 역사 보고서 발간
  • 김윤태 기자
  • 승인 2021.06.14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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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서울 신문로2가는 옛 경희궁 영역과 거의 일치하는 지역으로 경희궁의 흥망성쇠와 명맥을 같이하는 곳이다.

왕이 떠난 경희궁터에는 일제강점기 학교와 전매국 관사지가 들어섰고 해방 이후 서울고등학교와 고급주택지가 형성됐다. 서울고등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경희궁 일부가 복원되고 서울역사박물관이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장은 지난해 신문로2가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의 결과를 담은 『신문로2가, 궁터에서 시민공간으로』 보고서를 지난 5월 발간했다고 14일 밝혔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이 불타고 창덕궁은 기거하기를 꺼려해 왕기가 서렸다는 곳에 1617년 경희궁을 건설했다. 1865년 경복궁 중건이 시작되자 경희궁 전각의 목재와 석재는 새로운 궁궐의 자재로 활용됐고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경희궁의 빈터는 명례궁 등 4개의 궁에 토지로 분배되고 뽕나무가 심어지는 등 궁으로서의 위상은 점점 사라졌다.

또한 일부 전각과 빈 땅은 권업박람회 예정지로 지정되거나 각종 사교모임의 장으로 활용됐으며 궁의 경계부는 각종 개발로 모호해졌다. 남쪽부지는 전차개설과 신문로 확장으로 궁의 일부가 잘려나갔으며 동쪽은 전매국 관사 건설로, 서북쪽은 경성측후소와 남감리교 숙소가 건축돼 광활한 경희궁과 주변의 영역구분은 점차 흐려졌다.

경희궁지는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일부는 보존해 전시되거나 안내판이 설치돼 시민에게 공개하고 있다. 특히 경희궁의 동쪽 경계부는 흔적이 남아 궁장의 일부가 복원됐으며 경희궁의 정자 춘화정이 있던 성곡미술관에는 숙종대 설치한 반월형 석조 연못이 발견돼 일반 시민에게도 공개하고 있다.

1910년 설립된 경성중학교는 조선에 거주하는 고위급 일본 관료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학교로 설립됐다. 초기에는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등 경희궁의 일부 전각을 사용했지만 1926년 이후 하나씩 건물이 매각됐다. 경성중학교는 본관, 체육관, 수영장, 테니스코트, 도서관, 강당 등을 갖춘 최신 시설의 학교로 명성을 날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전쟁이 격화되자 서울 곳곳에 방공호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경성중학교 부지 내 방공호 건설 공사는 1944년 겨울부터 시작돼 체신국 직원들과 경성중학교 학생들을 동원해 건설했다. 미완성인 채로 해방을 맞이했고 6·25전쟁 당시 군인들이 잠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도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인근에 방공호는 남아있으며 서울고등학교 학생들의 회고담에도 접근금지 장소로 자주 거론되고 있다.

서울중학교는 해방 이후 경성중학교에서 새롭게 거듭난 신흥학교로 선생과 학생을 모두 새로 모집해야 했다. 당시에 월남한 이북 명문중학교 출신 학생들을 대거 서울고등학교에 입학시키면서 학생 수를 충원할 수 있었다.

서울고등학교는 신설학교였지만 경성중학교의 시설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일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정문에서 들어서면 왼쪽 언덕에 있던 신사를 허물고 그곳에 삼일탑을 세웠으며 각종 기념비와 무기고 등을 철거했다.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동쪽에 있는 조용한 고급주택지는 1920년대 형성된 전매국과 총독부 관사지로 개발된 지역이다. 일본은 늘어나는 경성 거주 일본인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의 관사를 건설했는데 대부분은 부지확보가 쉬운 빈 땅의 국유지, 산자락, 조선 시대 대형필지 등에 자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희궁과 경복궁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고 궐내와 주변에 대규모 관사가 건설된 것이다.

1921년 공터로 남아있던 경희궁지 내 동측 약 2만1500평 부지에 35호의 전매국 관사가 건설되기 시작해 1922년 완공됐다. 북서·남동 방향으로 관사가 배치됐고 관사와 나란하게 관통하는 3개의 가로가 마련됐다. 이후로도 몇 차례에 추가 관사 건설이 이루어졌고 주변 내수동 관사, 신문로1가 관사지와 더불어 대규모 관사지를 형성했다.

토지대장과 각종 신문기사와 법규를 살펴보면 국유지인 신문로2가의 토지가 개인으로 소유자가 바뀌는 시기는 1955년 전후다. 초기 소유주는 대부분은 불하를 통해 신문로2가 관사를 확보한 것으로 추측된다. 초기 소유자 중에는 전매국 소속 공무원을 비롯한 공무원, 기업인, 정치인들이 대다수였다.

1950~1960년대 유입된 기업인들은 초기 소유주인 라익진(동아무역 대표), 김형남(일신방직 대표), 조정구(삼부토건 대표), 임대홍[미원(현 대상그룹) 대표]을 필두로 초기 소유주에게 매입한 김성곤(쌍용 대표), 황규삼(풍성전기 대표), 배현규(한일투자금융 대표), 김동신(금강제화 대표), 서병식(동남갈포벽지 대표), 김신권(한독약품 대표), 신춘호[롯데공업(현 농심) 대표], 고홍명(파이롯트 대표), 이건희(삼성) 등이다.

이건희는 주택을 매입해 철거한 후 공지 상태인 채로 부지를 계속 소유했고 나머지 기업인들은 실제로 거주했다. 1970년대 새롭게 이주한 인물로는 김우중(대우 대표)과 김재홍(한승건설 사장) 등이 있다.

명문학교와 인접해 주거 선호도가 높은 신문로2가는 1974년 고교평준화·학군제 도입과 1976년 도심 내 명문고의 강남 이전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강남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논현동 일대의 주택지가 부각되고 최고가를 자랑하던 신문로2가의 주택지 선호도는 급격히 떨어져 1983년 최고가 주택지의 자리를 논현동에 내어주게 됐다.

1990년대까지도 일제강점기 일본 관사를 유지하면서 거주한 이동 일가(서울특별시 부시장·1941~2018)는 2세대에 걸쳐 이곳에서 자녀들을 키웠으며 신문로에서 가장 오랫동안 관사를 유지한 집안이다.

『2020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신문로2가, 궁터에서 시민공간으로』은 서울책방 홈페이지(https://store.seoul.go.kr)에서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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