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혁명성…근본적 변화의 창조적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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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혁명성…근본적 변화의 창조적 에너지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2.03.28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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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②김만중 『구운몽』…현실의 삶과 가상의 삶Ⅳ
김만중이 지은 소설 『구운몽』을 도해한 구운몽도(九雲夢圖).
김만중이 지은 소설 『구운몽』을 도해한 <구운몽도(九雲夢圖)>.

[한정주=고전연구가] 김만중의 『구운몽(九雲夢)』은 우리나라 고전 가운데 제목 뜻 그대로 ‘뜬구름 같은 아홉 개의 꿈’ 이야기를 통해 ‘욕망과 꿈’, ‘진짜 현실과 가상현실’, ‘현실의 삶과 가상의 삶’의 관계와 이치를 가장 생동감 넘치게 다루고 있는 한글소설이다.

『구운몽』은 현실 세계에서 스님 성진의 억압된 욕망이 꿈속 세계, 즉 가상 세계에서 양소유를 통해 하나씩 하나씩 실현되는 이야기 구조로 되어 있다. 프로이트의 ‘꿈의 세계는 욕망의 세계’라는 말에서 사실 욕망은 ‘현실에서 억압된 욕망’을 의미한다. 현실 세계에서 억압된 욕망은 그 억압의 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꿈의 세계(가상세계)에서 더욱 더 강력하게 작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 세계에서 욕망의 억압은 꿈의 세계(가상 세계)에서 욕망의 발산과 반비례한다.

스님 성진은 고승(高僧)으로 명성이 자자한 육관대사의 수제자이다. 육관대사는 “총명과 지혜가 수백 명 제자 무리 중에서도 단연 빼어난” 성진을 크게 소중히 여겨 장차 “도를 전수할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성진은 육관대사의 심부름으로 동정호 용왕을 만나러 절을 떠나게 되었다. 성진이 절을 떠난 후 남악(南岳:형산)의 선녀(仙女) 위부인을 모시는 팔선녀(八仙女)가 육관대사를 찾아온다. 동정호 용왕을 만나고 절로 돌아오던 성진은 돌다리에 앉아 놀고 있는 팔선녀와 우연히 마주친다. 팔선녀를 본 뒤 성진은 그 아름다운 모습과 고운 목소리를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 속세의 욕망을 멀리해야 할 스님의 신분으로 절대 품어서는 안 되는 정념(情念)을 품게 된다. 여인에 대한 성진의 정념은 결국 부귀영화의 욕망으로 확장한다. 억압되어 있던 무의식의 욕망이 팔선녀를 만나면서 마침내 의식의 수면 위로 부상한 셈이다.

“남자가 세상에 나서 어려서는 공맹(孔孟)의 글을 읽고 자라서는 요순(堯舜) 같은 임금을 만나 나면 장수되고 들면 정승이 되어 비단옷을 입고 옥대를 두르고 궁궐에 조회하고 눈으로 고운 색을 보고 귀로 좋은 소리를 듣고 은택(恩澤)이 백성에게 미치고 공명(功名)을 후세에 전함이 또한 대장부의 일이라. 우리 부처의 법문은 한 바리 밥과 한 병 물과 두어 권 경문과 일백여덟 개 염주뿐이라. 도가 비록 높고 아름다우나 적막하기 심하도다.” (김만중 지음, 송성욱 옮김, 『구운몽』, 민음사, 2003, p16.)

육관대사는 성진이 팔선녀를 만난 뒤 욕망의 노예가 되어 부처의 가르침을 저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결국 육관대사는 성진의 죄를 물어 지옥세계의 하나인 풍도(豊都)로 추방한다. 이때 육관대사는 부처의 깨끗한 땅을 더럽혔다면서 팔선녀 역시 죄를 물어 풍도로 함께 보냈다. 그리고 풍도의 염라대왕은 성진과 팔선녀에게 인간으로 환생하는 처분을 내린다.

『구운몽』에서는 인간 양소유로 환생한 성진의 삶을 꿈속 세계(가상 세계)로 설정하고 있다. 인간 세계의 양소유로 환생한 성진은 이후 성장해서 역시 인간으로 환생한 팔선녀를 한 명 한 명 만나 자신의 아내로 삼는다. 양소유가 아내로 삼은 2처(妻) 6첩(妾), 즉 정경패와 난양공주 그리고 계섬월, 가춘운, 적경홍, 진채봉, 심요연, 백능파 등이 인간으로 환생한 팔선녀이다. 양소유는 인간으로 환생한 이들 팔선녀를 한 명 한 명 만나면서 억압당한 현실의 욕망을 꿈 속 세계(가상 세계)에서 마음껏 발산한다.

또한 양소유로 환생한 스님 성진은 인간으로 환생한 팔선녀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장수가 되어 공명(功名)을 세우고 황제의 사위와 정승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린다.

말년의 양소유는 승상의 자리에 올라-황제를 제외한-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지위와 영예를 누리게 된다. 현실 세계에서 억압당한 스님 성진의 욕망을 마침내 모두 실현한 말년의 양소유는 어느 날 여덟 명의 아내와 함께 즐거움을 누리다가 문득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게 된다.

“소유는 원래 하남 땅에서 베옷 입던 선비라. 성스러운 천자의 은혜를 입어 벼슬이 장상에 이르고 낭자들이 서로 따라 정다운 정이 백 년이 하루 같도다. 만일 전생의 인연으로 모였다가 인연이 다하여 각각 돌아가는 것은 천지에 떳떳한 일이라. 우리 백 년 후, 높은 누대가 무너지고 연못이 메워지고 가무하던 땅이 변하여 거친 산과 시든 풀이 되었을 때, 나무꾼과 목동들이 오르내리며 탄식하여 말하되, ‘이곳이 양 승상이 여러 낭자들과 함께 놀던 곳이라. 승상의 부귀 풍류와 여러 낭자의 옥 같은 용모, 꽃다운 태도는 이제 어디 갔나뇨?’ 할 것이니 어찌 인생이 덧없지 않으리오?” (김만중 지음, 송성욱 옮김, 『구운몽』, 민음사, 2003, p227〜228.)

바로 이 순간 어느 이름 모를 스님이 양소유에게 다가와 웃으면서 “아직 춘몽(春夢)에서 깨어나지 못했느냐?”고 묻는다. 어리둥절한 양소유는 어떻게 춘몽에서 깨어날 수 있느냐고 다시 묻는다. 이에 스님이 손 가운데 돌지팡이를 들어 난간을 두어 번 치자 화들짝 깨어난 성진은 비로소 ‘양소유의 삶과 부귀영화가 자신의 하룻밤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육관대사가 꿈을 꾸게 해 자신의 잘못을 깨우쳐주려 했다고 생각한 성진은 그 즉시 스승을 찾아간다.

성진을 맞이한 육관대사는 “인간 세상의 부귀를 겪으니 어떻더냐?‘고 묻는다. 성진은 꿈속 세계를 통해 세속의 욕망을 탐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해준 스승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하지만 육관대사는 여전히 ‘현실의 욕망과 가상의 꿈’, ‘진짜 현실과 가상 현실’, ‘현실의 삶과 가상의 삶’을 구분하는 성진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힐책한다.

“네가 흥을 타고 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왔으니 내 무슨 관여함이 있으리오? 네 또 말하되 인간 세상에서 윤회하는 꿈을 꾸었다 하니 이것은 인간 세상의 꿈이 다르다 함이라. 네 아직 꿈을 온전히 깨지 못하였도다. 장주(莊周:장자)가 꿈에 나비 되었다가 나비가 다시 장주가 되니 무엇이 거짓이며 무엇이 진짜인지 분변하지 못했다. 성진과 소유가 누가 꿈이며 누가 꿈이 아니뇨?” (김만중 지음, 송성욱 옮김, 『구운몽』, 민음사, 2003, p231.)

욕망은 억압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더욱 내면 깊숙한 곳으로 숨어든다. 욕망은 심연에 자리 잡으면 자리 잡을수록 현실의 삶에 더욱 강력하게 작용한다. 삶에서 욕망을 떼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욕망은 더욱 삶에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삶의 공간이 현실 세계이면서 가상 세계인 것처럼, 욕망의 무대 역시 현실의 삶이면서 가상의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삶과 욕망을 구분하는 것, 또한 삶에서 욕망을 분리시키려고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오히려 삶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욕망을 받아들이면 어떨까. 욕망하는 순간 우리의 삶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삶’을 욕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장자가 나비가 되었겠는가. ‘세속의 부귀영화’를 욕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성진이 양소유가 되어서 팔선녀를 아내로 삼고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욕망하는 바로 그 순간 비로소 현실의 삶과 가상의 삶,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 사이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욕망의 혁명성, 즉 창조적인 에너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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