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와 같은 욕망의 이중성…피할 수 없는 삶의 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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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스와 같은 욕망의 이중성…피할 수 없는 삶의 숙명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2.09.26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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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⑦ 테네시 윌리엄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욕망한다’는 말의 의미Ⅳ

[한정주=고전연구가] 어쨌든 블랑시가 욕망의 ‘희극성’, 즉 삶의 변화 가능성을 막 손에 잡으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야누스와 같이 욕망의 다른 얼굴이 등장한다.

블랑시가 자신의 욕망 속에서 상상하고 꿈꾸고 있는 동안, 스탠리는 ‘천박한 유인원’이라고 모욕당한 데 대해 앙갚음을 할 작정으로 블랑시의 뒷조사를 하고 다닌다. 스탠리는 거짓말로 꾸며진 블랑시의 과거를 알아내고, 그 사실을 아내 스텔라와 친구 미치에게 폭로한다. 새로운 삶에 대한 블랑시의 욕망은 결국 스탠리의 폭로 앞에 무너지고 만다.

스탠리를 통해 블랑시의 과거 남성 편력을 알게 된 미치는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결혼이 아닌 그녀의 육체만을 욕망한다. 하지만 블랑시의 욕망 속 미치는 육체관계만 맺고 끝나버린-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남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이다. 블랑시는 진심으로 자신을 아껴주고 존중해주며 사랑해주는 미치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육체관계만을 원하는 미치는 블랑시가 욕망하는 미치가 아니다. 블랑시는 육체관계만을 원하는 미치에게 결혼하지 않는다면 육체관계도 맺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결국 블랑시의 욕망과 미치의 욕망이 어긋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파경에 이르고 만다.

그럼 현실의 욕망이 파산하고 난 후 블랑시의 욕망은 사그라졌을까. 아니다. 본래 욕망이란 현실 세계에서 실현 불가능하면 할수록 더 강렬한 집착의 모습을 띤 채 가상(상상)의 세계로 숨어드는 속성을 갖고 있다.

현실의 욕망이 파산하자 블랑시는 가상(상상)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한다. 가면과 거짓으로 감추어진(포장된) 블랑시의 욕망은 최후의 순간-실존하는 인물인지 아니면 가공의 인물인지조차 종잡을 수 없는-‘댈러스의 백만장자 셰프 헌틀리’를 통해 발산된다.

블랑시는 자신의 욕망을 파탄에 이르게 한 스탠리가 자신을 겁탈하던 날 밤 그를 향해 미친 듯이 절규한다. 블랑시의 절규 속에는 그동안 그녀가 상상하고 꿈꾼(혹은 감추고 포장한) 욕망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의 모습이다.

“그 사람(필자-셰프 헌틀리)은 신사고 나를 존중해줘요. (흥분해서 말을 만들어 내며)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은 내가 친구로 함께 있는 거예요. 재산이 많다는 게 때로는 사람을 외롭게 만들거든요! 세련되고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자는 남자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수 있죠, 한없이 말이죠! 나는 그런 것들을 제공할 수 있어요. 그런 것들은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육체적 아름다움은 사라지죠. 순간적이죠. 하지만 마음의 아름다움과 영혼의 풍요로움 그리고 가슴속 부드러움은… 나는 그런 것들을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런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더 증폭되죠! 세월이 가면 갈수록이요! 내가 가난한 여자라고 불려야만 하다니 정말 이상하죠! 내 가슴속에 이런 보물들이 간직되어 있는데요. (목이 멘 흐느낌이 흘러나온다.) 나는 나 자신을 매우 부유한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어리석었죠, 돼지(필자 - 미치)에게 진주를 던지다니!” (테네시 윌리엄스 지음, 김소임 옮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민음사, 2007, p143.)

새로운 삶을 꿈꾼 미치와의 관계가 파탄 난 직후 극도의 정신적 혼란 상태에서 스탠리에게 겁탈까지 당하자 블랑시는 현실과의 마지막 연결 고리를 놓고 만다. 미쳐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놓아버린 마지막 순간에도 블랑시는 자신의 욕망만은 끝내 놓지 못한다. 블랑시는 자신을 정신병원으로 데려가기 위해 의사와 간호사가 찾아온 그 순간에도 ‘댈러스의 백만장자 셰프 헌틀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결국 정신병원으로 끌려간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헤로인 블랑시의 삶과 파멸처럼 ‘변화 가능성’과 ‘실현 불가능성’이라는 이중성 때문에 욕망은 희극과 비극, 희망과 절망의 변곡선을 연출한다. 우리 역시 야누스와 같은 욕망의 이중성을 어떻게 대하고 다루느냐에 따라 희극과 비극,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욕망은 인간에게-피하고 싶어도 결코 피할 수 없는-숙명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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