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좀 벌레 한 마리…“진실로 하려고 한다면 들어가지 못할 곳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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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좀 벌레 한 마리…“진실로 하려고 한다면 들어가지 못할 곳이 없구나”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2.08 12: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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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②
 

[한정주=역사평론가] 흰 좀 벌레 한 마리가 내 책 『이소경(離騷經)』 속의 ‘추국(秋菊)·목란(木蘭)·강리(江蘺)·게거(揭車)’의 글자를 갉아먹었다. 내가 처음에는 크게 화가 나 잡아서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조금 지나자 기이하게도 그 좀 벌레가 향기로운 풀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좀 벌레의 머리와 수염에서 넘쳐나는 특이한 향기를 검사해보고 싶은 마음에 돈을 주고 어린아이를 구해 대대적으로 찾아보게 했다.

반나절이 걸려 갑자기 좀 벌레 한 마리가 줄기 사이에서 기어 나왔다. 그런데 손으로 잡으려고 하자 마치 흐르는 물처럼 재빠르게 달아나버렸다.

단지 번쩍거리는 은가루만 녹아 종이 위에 떨어졌을 뿐이다. 끝내 좀 벌레는 나를 저버렸다. (재번역)

有一白蟫 食我離騷經 秋菊木蘭江蘺揭車字 我始大怒 欲捕桀之 少焉 亦奇其能食香草也 欲撿其異香 溢于頭鬚 購童子大索半日 忽見一蟫 脉脉而來 手掩之 疾如流水 廼逝 只銀粉閃鑠 墜之于紙也 蟫終負我耳 『선귤당농소』

이덕무와 그의 사우(師友)들은 풀과 꽃과 새와 벌레와 같이 지극히 미미한 사물도 모두 지극한 경지를 갖추고 있어서 하늘과 자연의 묘한 이치를 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들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사물을 관찰하다가 느끼고 깨달은 것을 소재와 주제로 삼은 글을 즐겨 썼다.

그것은 18세기 조선에 새롭게 출현한 문예 사조였다. 이덕무가 속한 ‘북학파’와 쌍벽을 이루었던 지식인 그룹, 즉 ‘성호학파’의 큰 스승인 이익 역시 이와 동일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

이덕무가 책의 글자를 갉아 먹은 흰 좀 벌레를 소재 삼아 쓴 글과 유사한 글 한 편이 이익의 소품문 모음집인 『관물편(觀物篇)』에 수록되어 있다.

좋아하는 먹을거리가 생겨 나중에 먹으려고 종이에 싸서 상자에 넣어두었다. 꽤나 깊고 은밀한 곳이었다. 어느 날 그 상자를 열어 보다가 검은색의 작은 벌레를 발견했다. 이익은 그 순간 자신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재빨리 붙잡아 이렇게 표현한다.

“진실로 하려고 한다면 들어가지 못할 곳이 없구나. 막을 방법이 없다. 소인의 무리가 몰래 틈을 노렸다가 뜻을 이루는 이치와 비슷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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