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종이·먹·벼루·마음·눈·팔뚝 그리고 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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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종이·먹·벼루·마음·눈·팔뚝 그리고 손가락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2.10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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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③
 

[한정주=역사평론가] 붓은 마른 대나무와 죽은 토끼의 털이고, 먹은 묵은 아교와 까만 그을음이고, 종이는 떨어진 삼베와 헐은 천 조각 이고, 벼루는 오래된 기와와 무딘 쇠 조각일 뿐이다. 그런데 그러한 물건들이 어떻게 사람의 정신과 뜻과 생각과 더불어 기이한 변화와 신기한 조화를 부릴 수 있을까?

지금 붓과 종이와 먹과 벼루를 가지고 흡사 혈육(血肉)이 숨 쉬는 심장과 같고, 굽혔다 폈다 하는 팔뚝이나 손가락과 같고, 그윽하거나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과 같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반드시 믿지 않을 것이다.

또한 붓은 먹과 같고, 먹은 종이와 같고, 종이는 벼루와 같고, 마음은 눈과 같고, 눈은 팔뚝과 같고, 팔뚝은 손가락과 같다고 말한다면 비록 눈을 똑바로 뜨고 긴 시간 동안 바라보며 위로 생각하고 아래로 관찰해도 그 모양이 닮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이 한 번 어떤 상태에 빠져들고 그 형상에 충동과 감정이 일어나서 만약 무엇인가를 하게 되면 갑자기 눈동자가 바뀌고 팔뚝이 움직이며 손가락이 좇아가 잡게 된다.

벼루가 모름지기 먹이 되고, 먹이 모름지기 붓이 되고, 붓이 모름지기 종이가 된다. 그리고 종이에 종횡(縱橫)으로 마구 쓰고 좌우(左右)로 내달려 순식간에 하늘 높이 날아올라 출입(出入)과 변화(變化)를 이루게 된다.

이렇게 몸과 마음에 기운을 얻고 뜻이 가득해지면 안 되는 것이 없다. 마음은 눈을 잊고, 눈은 팔뚝을 잊고, 팔뚝은 손가락을 잊고, 손가락은 먹을 잊고, 먹은 벼루를 잊고, 벼루는 붓을 잊고, 붓은 종이를 잊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면 팔뚝과 손가락을 마음과 눈이라고 불러도 괜찮고, 붓과 종이와 먹과 벼루를 마음과 눈과 팔뚝과 손가락이라고 불러도 좋고, 먹과 벼루를 붓과 종이라고 불러도 된다.

급기야 마음은 수습되어 고요해지고 눈은 맑게 안정이 되어 팔뚝과 손가락을 소매 속에 거두어들인다. 먹을 닦고, 벼루를 씻고, 붓을 집어넣고, 종이를 말아 둔다. 잠깐 사이에 붓과 종이와 먹과 벼루와 마음과 눈과 팔뚝과 손가락이 모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또한 종전에 이리저리 힘을 썼던 일도 잊어버린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삼는다면, 홀로 사는 과부의 방석과 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효자의 이불이 가히 이상한 질병에 효험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운이 이미 결합되고 또한 서로 뜻이 맞게 되면 초나라 사람의 쓸개와 월나라 사람의 간(肝)조차 서로 견주어 함께 합할 수 있는 것이다. (재번역)

筆枯筠死免也 墨陳膠剩煤也 紙敗麻爛糓也 硯老瓦頑鐵也 何與人精神意想奇變幻化事也 今以筆紙墨硯 謂似血肉之心包 屈伸之腕指 眈耽之眼孔 則人必不信矣 且謂筆肖墨墨肖紙 紙肖硯心肖眼 眼肖腕腕肖指也 則雖明目張膽 仰思俯察 不其近矣 然吾心一寓境觸象 若有所爲 則忽眼爲之轉 腕爲之運 指隨以操 硯須墨墨須筆筆須紙 紙橫欹仄左右馳驟 頃刻飛騰出入變化 氣得意滿無所不可 心忘眼眼忘腕腕忘指指忘墨墨忘硯硯忘筆筆忘紙 當此之時 呼腕指爲心眼可也 呼筆紙墨硯爲心眼腕指可也 呼墨硯爲筆紙可也 及其寂然心收 湛然眼定 腕指拱于袖 拭墨洗硯 閣筆軸紙 則俄然之間 筆紙墨硯 心眼腕指 不相爲謀 又忘前之周旋矣 是知因材收用 則寡婦之茵孝子之衿 可策勳於奇疾也 氣旣合而又相得 則楚之膽越之肝 可同照而幷投也. 『이목구심서 1』

붓과 먹과 종이와 벼루는 생기(生氣) 없는 물건일 따름이다. 반면 사람의 정신과 생각과 감정은 생동(生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슴 속과 그 목과 그 입에 오래도록 묵히거나 쌓인 것을 도저히 참거나 막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린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가 어느 날 문득 아침 풍경에 감정이 치솟아 일어나고, 탄식이 절로 터져 나오고, 울분을 마음껏 풀어내고, 불평을 거리낌 없이 하소연하고, 기구함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된다.

한순간 붓과 먹과 종이와 벼루를 펼쳐놓고 자신의 감정을 토하고, 생각을 내뱉고, 마음을 풀어내듯이 글을 써내려 간다. 붓과 먹과 종이와 벼루가 사람의 정신과 생각과 감정과 마음이 된다. 생기 없던 물건이 별안간 생동하는 물건으로 변한다.

무엇이 붓이고 먹이고 종이고 벼루고 또한 무엇이 정신이고 생각이고 감정이고 마음인지 구분할 수 없다.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는 것이다.

기운을 얻고 뜻이 맞으면, 이렇듯 세상 모든 것이 생동(生動)하고 유동(流動)하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이탁오의 『분서(焚書)』 속 ‘잡설(雜說)’의 말을 차용해 표현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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