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정의의 역사는 승자가 만든 허구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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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정의의 역사는 승자가 만든 허구일 뿐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2.12.07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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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⑨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탐욕과 광기와 식인의 역사Ⅳ

[한정주=고전연구가] 역사는 냉정하게 말하면 승자의 역사, 곧 승자가 만든 역사이다. 승자가 가장 좋아하는 역사는 진보와 정의의 신화이다. 역사를 진보와 정의의 눈으로 보면 역사를 만든 승자가 곧 진보와 정의의 수호자이자 구현자(具現者)가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역사를 진보와 정의의 신화가 아닌 식인과 탐욕과 광기의 역사로 보면 어떻게 될까. 진보와 정의의 역사를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승자라는 작자들은 모두 탐욕으로 가득한 살인자 혹은 광기어린 살해자에 불과하게 된다. 이쯤에서 생각해보자. 역사의 승자, 곧 역사 속 영웅과 위인들은 어떤 사람인가.

역사서의 고전이라고 불리는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펼쳐보자. 탐욕으로 가득한 살인자, 광기어린 살해자의 이야기로 온통 도배되어 있다. 중국사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운 진시황의 잔혹한 살인극이야 워낙 널리 알려져 있으니 새삼 입에 담을 필요도 없고 진시황의 증조할아버지 되는 소양왕 이야기를 해보자.

소양왕이 진나라를 다스리던 때 수하 장군 백기는 천하 통일의 대의(大義)라는 미명하에 장평 전투에서 조나라 포로 40만명을 생매장해 학살했다. 역발산기개세의 영웅 항우 역시 무도한 진(秦)나라를 정벌한다는 대의를 앞세워 함곡관(函谷關) 부근 신안에서 포로로 잡힌 진나라 병사 20만 명을 생매장해 죽였다.

모든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칭송하는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는 또 어떤 인물인가. 자신이 지닌 병법과 용병술의 탁월함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 오나라 왕 합려 앞에서 군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죄 없는 후궁들의 목을 아무렇지도 않게 베어버린 사람이 바로 손무이다.

『오자병법』의 저자 오기는 손무보다 더 탐욕스럽고 추악하며 잔혹하다. 노나라 임금은 오기를 장군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런데 노나라 신하들은 오기의 아내가 적대국 제나라 출신이라면서 반대했다. 그러자 오직 노나라 장군이 될 욕심에 오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아내를 죽여 버린다. 그렇게 의심을 벗은 오기는 마침내 노나라 장군이 되어 출세가도를 달리며 큰 명성을 얻게 된다.

또한 조선 건국의 영웅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이 죽인 고려 왕족과 신하와 유민(流民)은 얼마나 많은가. 정도전과 이방원의 권력 투쟁 와중에 살육당한 사람은 도대체 몇 명인가. 또한 일본 전국시대의 영웅 오다 노부나가가 죽인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로마의 영웅 카이사르가 명성과 권력을 얻는 과정에서 살해한 갈리아(프랑스) 사람, 브리튼(영국) 사람 그리고 이집트 사람은 도대체 몇 명인가. 내전 중 카이사르가 죽인 로마인은 또한 얼마나 많은가. 인간의 역사에 기록된 이러한 사례들을 말하자면 아마도 몇 달 아니 몇 년이 걸려도 다 언급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루쉰과 조너선 스위프트가 이토록 통렬하게 인간의 역사를 ‘더럽고 끔찍하고 추악하며 잔혹한’ 역사로 풍자한 까닭은 무엇인가. 역사를 진보와 정의의 신화가 아닌 ‘식인과 탐욕과 광기의 역사’로 성찰하는 것은 우리가 만들고 있는 현재의 역사 그리고 만들어갈 미래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모색할 수 있는 또 다른 역사 독법(讀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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