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과 벌집…일의 순서와 차례가 분명하고 또한 단단하고 치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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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과 벌집…일의 순서와 차례가 분명하고 또한 단단하고 치밀하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2.11 07: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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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④
 

[한정주=역사평론가] 내가 어렸을 때 누각 기둥에 있는 구멍이 몇 되(升)나 되는 크기인데 누런빛을 띠는 붉은 색의 마치 대추만한 벌이 무리를 지어 모여 있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벌들이 꿀을 거두려고 꽃을 찾아 모두 나갔을 때 구멍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가늘고 바짝 마른 풀이 쌓여 있고 헝클어진 실과 찢어진 종이 등 여러 가지 부드럽고 따뜻한 물건들이 있었다.

구멍 속에는 마치 고치와 같은 하나의 검은 덩어리가 있었다. 뾰쪽뾰쪽한 것이 서로 연이어져 연방(蓮房)을 이루고 있었다. 한 방(房)마다 반드시 하나의 애벌레가 있는데 밀랍으로 단단하게 봉해져 있었다.

나는 예전처럼 넣어서 감춘 다음에 며칠이 지난 후 다시 꺼내어보았다. 애벌레는 비로소 머리와 눈과 날개와 발을 갖추었는데, 마치 양(羊)의 기름과 같이 하얗고 아직 어려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다시 그대로 넣어 간직해두었다.

여러 날이 지난 후 또 꺼내보니 모든 방마다 꿀이 가득 차 있고 붉은 밀랍으로 봉해져 있었다. 무릇 벌이 모두 완전한 형상을 이루어 나간 뒤 비로소 그 속에 꽃으로 꿀을 만들어 채워 넣었다.

일을 이루는 순서와 차례가 분명하고 또한 단단하고 치밀하다. 어찌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재번역)

余幼時見樓柱有穴可容數升 有蜂大如棗黃赤色 成群屯聚 乘其采花 盡出探穴 則積細枯草 亂絲裂紙諸軟暖之物 其中有一黑塊如繭者 相聯接矗矗 成蓮房 每一房必有一蠐螬 以蠟堅封之 余仍如前藏置 後幾日又發 則蠐螬始具頭眼翅足 白如羊脂 痴而不動 仍又藏置 後多日又發 每房蜜皆盈焉 以赤蠟封之 盖蜂皆成形以出 而始釀花爲蜜於其中 作事有次第 且堅緻可愛也. 『이목구심서 1』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에는 생물, 특히 과거 우리 생활 주변 가까이에 존재했던 동물과 식물들을 통해 천하 만물의 이치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과 세태까지 포착하는 우언(寓言) 혹은 우화(寓話)와 같은 종류의 소품문이 아주 많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개미, 누에, 벌, 말똥구리, 나비, 거미, 벼룩, 풀벌레, 물개, 이, 뱀, 제비, 참새, 나귀, 비둘기, 개, 말, 고양이, 족제비, 쥐, 닭, 사슴, 곰, 호랑이 등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수많은 동물이 등장한다.

더욱이 오동나무, 뽕나무, 회나무, 소나무, 매화나무, 오이, 버드나무, 봉선화 등 식물에 대한 우언 역시 적지 않게 실려 있다.

그중에서도 벌과 개미와 거미와 같은 곤충, 벼룩과 이와 같은 벌레, 쥐와 족제비와 구렁이와 닭과 같은 짐승, 소나무와 회나무 등에 관한 우언과 우화가 특히 많다.

그런 의미에서 이덕무는 성명(性命)이나 이기(理氣) 혹은 사단칠정(四端七情)이나 도덕윤리(道德倫理) 등을 중시한 유학과 성리학의 거대담론 속에서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조화와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고 글을 썼던 이전 시대나 동시대의 전형적인 양반 사대부 출신 지식인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우리 삶 가까이에 존재하는 지극히 미미하고 하찮은 사물들을 세밀히 관찰하면서-관점의 전환과 발상의 변화를 통해-우주와 자연과 인간 세계의 원리와 이치를 깨우치려고 했다.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에 담긴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의 아름다움 가운데 하나인 ‘우언소품(寓言小品)의 미학’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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