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不平)과 화평(和平) 사이에서…머리와 마음속 오간 잡감의 조각들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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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不平)과 화평(和平) 사이에서…머리와 마음속 오간 잡감의 조각들 묘사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2.13 08: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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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⑥
 

[한정주=역사평론가] 바야흐로 이경(二更 : 밤 9시〜11시)이나 삼경(三更 밤 11시〜새벽 1시) 무렵 문을 마주하고 있는 이웃집에서 떠들고 웃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세찬 바람이 일어 눈송이가 창틈으로 몰아닥쳐서 곧바로 등잔불의 그림자를 덮치고 벼루에도 펄럭펄럭 날아와 떨어졌다.

이때 내가 옛날 생각에 감정이 움직여 참으로 비통하고 애절하였다. 다만 손가락 끝으로 마음이 가는대로 화로의 재를 뒤적였다. 그 모양이 모나고 바른 것은 혹은 전자(篆字)나 주문(籒文)과 닮았고, 그 모양이 얽히고 맺힌 것은 혹은 행서(行書)나 초서(草書)에 가까웠다.

내가 연달아 들여다보았지만 끝내 그것이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눈썹 근처가 마치 돌처럼 무겁게 느껴져 스스로 얼굴 뺨의 그림자를 돌아보다가 무너지듯 누워버렸다. 그리곤 이내 다시 엄숙히 옷깃을 여며 가지런히 하고 자세를 똑바로 하고 조용하게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집중해 집의 대들보를 올려다보니 고인(古人)의 아름다운 행실과 고상한 절개가 역력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에 분개한 마음에 “명예와 절개를 세울 수 있다면 비록 바람과 서리가 휘몰아치고 파도를 넘나들며 십중팔구 죽음에 이른다고 할지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겠다.”라고 말하였다. 더욱이 인간을 얽어매는 쌀과 소금 부스러기나 삶을 옭아매는 온갖 물건 역시 거의 다 말끔하게 벗어 내던져버렸다.

어린 아우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불에 누워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심히 자득(自得)한 것이 있으니 상쾌하구나! 내가 이에 불현듯 화평(和平)과 불평(不平) 중 어떤 것이 나은지 깨달았다.

비로소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마주잡고『논어(論語)』서너 장을 읽어 내려갔다. 그 소리가 처음에는 목에 막혀서 더듬다가 마침내 화평해졌다. 가슴속에 맹렬히 타올랐던 기운은 거듭 탄식하다가 점차 미약해졌다. 답답했던 기운이 비로소 가라앉고 정신은 맑아지고 생각이 밝아져 씻은 듯 시원했다.

중니(仲尼 : 공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 온화하고 기쁜 말과 글의 기운이 나로 하여금 거칠고 추한 마음을 사라지게 만들어 이내 화평에 다다르게 하는가. 부자(夫子 : 공자)가 아니었다면 내가 거의 발광(發狂)하여 달아나버렸을 것이다. 전에 한 일을 생각해보니 아득하기가 마치 꿈과 같다. 을유년(乙酉年 : 1765) 12월 초7일에 쓰다.” (재번역)

方二更三更 對門隣舍 喧笑之聲 遠遠時聞 而急風吹雪片 從窓隙直赴燈影 翻翻然墜于硯也 余時感舊之心正悲切 只將指尖隨意而畫爐灰 方正者或肖于篆籕 繆結者或近于行草 余脉脉終不知其爲何字也 忽眉稜如石 自顧頰影 頹然委頓 時復肅然整襟危坐而致敬 少焉凝然仰視屋樑 於是古人之瓌行危節 歷歷從思想來 慨然曰 名節可立 雖振撼風霜閱歷濤波 九于死而罔悔也 且人間米塩零碎諸掛罥之物 庶超脫而淨盡 稚弟也 則無知而偃于衾 睡聲佁儓甚自得也 快哉 余廼幡然而悟平與不平孰愈 始低眉拱手 讀論語三四章 其聲也初咽澁而終和平 胸中澎湃有嗚嗚漸微 欝嵂之氣始按下 神思淸明洒落 仲尼何人也 雍穆和悅之詞氣 使余麤心剝落銷磨 廼抵于平 非夫子 我幾發狂走 思前之爲 則遙如夢也 乙酉十二月初七日書. 『이목구심서 1』

별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생활 속 잡감(雜感)을 거리낌 없이 글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일상의 미학’이다. 일상은 그냥 두면 지나가 버리는 순간에 불과하지만 글로 옮겨 담으면 색다른 의미와 가치로 영원히 남게 된다.

이덕무는 추운 겨울 날 늦은 밤에서 이른 새벽까지 불평(不平)과 화평(和平) 사이를 오고간 잡감의 조각들을 묘사했을 뿐이다. 이러한 잡감이 하루 이틀의 일이었겠는가? 아마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밤 동안 자신의 머릿속과 마음속을 오고 갔으리라.

이덕무만이 그러했겠는가? 아마도 수 백 수 천 만의 사람들이 비슷한 심정과 감정의 기복을 겪었으리라.

그렇다면 이덕무와 그들의 차이는 단지 자신의 잡감을 글로 옮겨 묘사한 것과 시간의 흐름에 자신의 잡감을 그냥 보내버린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덕무의 일상 속 잡감은 250여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 나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큰 울림을 남기지만 시간의 흐름에 보내버린 수많은 사람들의 잡감은 도대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일상에 숨결을 불어넣고 생명을 부여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망설이지 말고 무엇이건 글로 옮겨라. 당신의 잡감은 무궁한 생명력을 갖게 될 것이다. 당신의 일상은 새삼 재발견되고 재창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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