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선경’…기암괴석과 고사목 사이로 피었다가 홀연히 흩어지는 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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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선경’…기암괴석과 고사목 사이로 피었다가 홀연히 흩어지는 운무
  • 이경구 사진작가
  • 승인 2023.05.16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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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구 사진작가의 산행일기](62) 중년의 고교 벗들과 떠난 지리산 종주 능선의 백미
[사진=이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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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끔은 머리와 달리 몸이 거부를 하는데도 시간을 거스르고 싶을 때가 있다. 서서히 몸이 달리는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는 중년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멀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머리는 희끄무레한 가르마길을 만들고 돌쇠 같았던 근육 뭉치도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한다. 자꾸 깜빡깜빡하는 기억력에 어이없어하면서 헛웃음이 배어나기도 한다.

이럭저럭 퇴직 연령이 다 된 나이지만 마음만은 청춘인 양 그대로 파랗게 남아있다. 중년 이후 버거운 몸뚱이는 공연한 ‘민폐’가 될 터. 내 몸뚱이가 쓸만한지 부대끼는지 남한 내륙의 최고봉인 지리산 종주로 체력을 시험해 보기로 하며 1박2일 35km의 산행 일정을 내딛었다.

이번 종주산행에 호기롭게 의기투합한 친구는 고교 동기 이병섭, 박길현, 서승진, 류병생이다. 오랜만에 장거리 종주인 만큼 준비물도 많고 여러 가지 신경이 쓰이고 뭘 자꾸 잊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면서 배낭을 꾸려 용산역에서 지난 9일 오후 4시37분 새마을호에 몸을 실었다

종착역은 전라선 구례구역이다. 수원역에서 승진이, 조치원역에서 병섭이, 서대전역에서 길현이가 각기 탑승했으며 광주에 있는 병생인 고속버스 편으로 구례에서 합류했다. 저녁 9시가 다 된 무렵에서야 참게탕으로 함께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역시 음식은 전라도여”라며 손바닥을 치며 친구가 권하는 소주잔을 두꺼비 파리 잡듯이 넙죽넙죽 받으며 몇 순배 들고 나니 목소리는 커지고 금새 웃음이 번진다. 권커니 잔커니 술자리를 나와 함께 인근 팬션에 들어 서너 시간 쪽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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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의 출전일이다. 꼭두새벽 3시에 일어나 들머리 성삼재(1090m)까지는 9인승 승합차로 이동했다. 해발 1100고지 한밤중 성삼재는 사위가 고요하며 찬 기운이 엄습해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트랭글을 켜고 성삼재에서 출발한 시각은 새벽 3시30분. 어두운 산길을 헤드렌턴 빛에 의지하며 긴 그림자를 끌고 걷는다. 까만 하늘에 박힌 반짝이는 별들이 일행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고개(1440m)까지는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고요한 적막에 묻혀 말없이 걸음을 서로에게 맞취가며 걷는다. 노고단고개를 지나 여명을 맞으면서 새벽이 밝아와 헤드렌턴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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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 고개에 아침 여명이 찾아 든다. [사진=이경구]

지리산의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좁은 산길을 따라 풋풋한 숲 내음이 온몸으로 자욱히 퍼진다. 멧돼지가 자주 출몰한다는 평평한 돼지령에서 좌측 피아골 삼거리를 지나 임걸령까지 3km 구간에서는 내딛기 좋은 내리막길로 속도를 붙였다. 임걸령에 도착한 시간은 6시. 옹달샘물에 목을 적신다.

노루목 삼거리(1480m)를 지나 삼도봉(1500m)으로 향한다. 업다운이 교차하며 서걱서걱한 진초록 조릿대가 무성한 능선길이다. 새벽이슬에 젖어 함초롬한 야생화는 등산길에 산객을 반겨주어 걸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보라색 얼레지꽃과 현호색 연달래 참꽃을 많이 볼 수 있었고 숲은 늦봄의 향취를 뿜어내고 있다.

얼마지 않아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삼도가 만나는 경계지점인 삼도봉에 도착했다. 남쪽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산물결은 마치 파도가 출렁이는 형상이다. 장쾌하게 뻗은 능선은 보기만 해도 듬직하며 지리산이 이래서 ‘어머니의 품’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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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봉에서 화개재(1316m)로 이어지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해발이 뚝 떨어지는 느낌이다. 기나긴 데크 계단을 내려서면 옛날에 남원의 산내 사람들과 하동의 화개 사람들 간에 물물교류가 있었던 고개가 있다.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는 법. 토끼봉(1534m)까지는 1.2km 오르막길로 발걸음이 점점 버거워진다. 허벅지와 종아리는 뻐근한 신호를 보내오고 발바닥에선 열이 올라온다. 토끼봉 정상부엔 헬리포트가 있고 평평한 초원지대로 조망이 터지지 않아 봉우리다운 맛은 없다.

잠시 쉬었다가 연하천 대피소로 걸음을 옮긴다. 토끼봉에서 연하천 대피소 3km 구간은 경사가 완만해 큰 어려움 없이 오르고 내리길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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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시작 7시간 만에 약 12km 걸음을 옮겨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해 짐을 내리고 김밥과 라면을 끓여 허기진 배를 채웠다. 승진이는 배낭을 뒤적이더니 눈치를 살피며 소주 한 잔 꼴깍 넘긴다. 모두 남몰래 한 순배 돌리니 ‘캬~ 기똥차다!’ 힘들게 온 만큼 식사와 휴식시간이 꿀맛처럼 달다.

식수를 보충하고 연하천 대피소를 나와 700m 전진하면 삼각고지에 닿고 이정표(이정목)는 벽소령 대피소까지 3.6km를 안내한다. 또다시 뚜벅뚜벅 긴 시간을 걷는다. 때론 가파르고 때론 사납지만 걸음을 채근하며 다그쳐 간다. 천수를 다하고 뼈만 곧추세운 고사목의 풍경과 깊고 울창한 초록의 숲이 지속되는 생명의 흐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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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부에 2개의 암봉이 솟아 있는 형제봉(1115.5m)에 도착한다. 동서남북이 모두 탁 트여 가야 할 천왕봉과 지나온 노고단, 하동의 악양 들판,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을 내려다 볼 수 있다.

형제봉을 내려와 벽소령대피소(1340m)에 안착한 시간은 오후 2시10분. 벽소령고개는 지리산 종주 산행의 중간 기점에 위치한 고개로 과거엔 함양과 하동을 이어주던 통로였다고 한다. 10년 전 지리산 종주 산행 때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기억이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배낭을 내리고 간식을 주식 삼아 대충 끼니를 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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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소령대피소를 떠나 선비샘(1456m)에 이르는 1시간 산길은 비교적 완만하며 맑은 샘물로 목을 축이고 식수를 보충한다. 고도를 높혀가며 돌길 암릉길을 번갈아 오르면 벽소령과 세석평전의 중간지점인 덕평봉(1338m)에 닿는다. 가야 할 동쪽 천왕봉 방향으로 시야가 툭 트여있고 남쪽으론 끝없는 산그리메가 마치 한폭의 수묵화처럼 번져 있다.

잠시 숨을 고르며 쉬었다가 칠선봉(1558m)으로 향한다. 무념무상으로 터벅터벅 발을 옮겨 일곱 분의 선녀님이 늘씬한 바위가 되었다는 칠선봉에 오후 4시에 이른다. 이제 얼마지 않아 오늘의 일박지 세석대피소가 나오리라. 허기진 배도 채우고 누울 자리가 있으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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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리산 종주구간에 가장 어렵다는 영신봉(1651m)이 수문장처럼 길을 막고 섰다. 하늘까지 맞닿아 있는 가파른 철계단은 ‘악!’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힘든 구간이다.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악에 악을 쓰며 한발두발 힙겹게 발걸음을 뗀다. 벗들은 서로에게 격려하며 기운을 북돋아준다. 이 구간에서 멘탈이 탈탈 털려 버렸다.

드디어 영신봉 정상이다. 힘겹게 오른 만큼 백두대간 지리산 주능선 조망이 장쾌하다. 동쪽으론 천왕봉이 우뚝 솟아 있고 북쪽으론 함양의 쪽 한신계곡 이어지며 백무동이 가늠된다. 이제 오늘 산행의 종착지 세석대피소는 0.5km 남는다. 우리말로 ‘잔돌밭’이란 세석평전이 펼쳐지고 드디어 하룻밤 쉬어갈 수 있는 세석 대피소에 오후 6시 도착했다. 산행 시작 후 23km를 이어온 거리다.

준비해온 삼겹살을 굽고 칼칼하게 라면을 끓여 허겁지겁 주린배를 채운다. 상추쌈과 김치 몇 가지 밑찬을 곁드린 산정식사는 어디 비할 수 없는 기막힌 맛이다. 다들 볼이 미어터진다. ‘두꺼비’ 한 잔씩 가득 부어 걸치면서 종주 산행의 긴 하루를 마친다. 참을 수 없는 피곤이 밀려왔고 내일 산행을 위해 하룻밤 눈을 부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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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석대피소. [사진=이경구]

이튿날 눈을 뜬 건 새벽 4시경이었다. 여전히 밖은 어두웠고 랜턴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다. 아침밥을 준비하며 어느샌가 정신이 맑아지면서 피곤함과 졸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새벽 5시 세석대피소를 나서며 다시금 헤드랜턴으로 길을 밝힌다. 촛대봉(1703m)은 세석대피소에서 0.7km 30분이면 오를 수 있는 암봉이다. 종주능선에서 최고의 전망대이기도 해 일행은 지리산 해돋이를 촛대봉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늦을까봐 속도를 붙였고 이윽고 새벽 5시30분 1800m 촛대봉 암릉에서 알현한 일출 장관에 압도돼 우리는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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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이 되는 천왕봉 뒤로 솟아오르는 일출은 경이롭고 장엄했으며 한참 동안 일행의 시선을 묶어 두었다. 동쪽으로 제석봉과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서쪽으로는 세석평전의 광활한 초원 위로 토끼봉과 반야봉, 노고단, 서북능선 등 첩첩한 지리산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감을 자아낸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지리산 일출의 감동을 안고 다시 걸음을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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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대봉에서 천왕봉을 배경으로 일출을 맞았다. [사진=이경구]

촛대봉을 내려 다음 경유지인 연하봉(1730m)으로 가는 능선길엔 기암괴석과 고사목이 어우러지며 하얀 운무가 피어났다가 홀연히 흩어져 이곳에선 마치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해 ‘연하선경’이라 불린다. 장터목대피소(1653m)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가파르지 않은 길을 오르내리는데 연하선경 이름에 걸맞게 경관이 너무 아름답다. 지리산 종주 능선의 백미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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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목 도착 후 지리산에서 마지막 산정식사로 삼겹살과 라면을 끓여 싹 비우고 식수를 보충해 배낭을 메고 나선다. 제석봉을 거쳐 천왕봉까지는 1.7km 거리. 제석봉으로 오름도 만만치 않지만 통천문을 지나면 마지막 가풀막 된비알에서 안간힘을 다 쏟는다. 고지대를 지키는 주목과 구상나무 메마른 고사목이 어우러진 풍경을 마주하며 마지막 기운을 다 해 지리산 정상 천왕봉(1915m) 꼭대기에 선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감개무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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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 1호 지리산은 100리 능선에 85개의 고산 준봉을 거느리며 3도 5개 시·군 15개 면에 광대하게 펼쳐진다. 장쾌하기 이를 데 없다 주능선이 병풍처럼 길게 펼쳐지는 장엄한 파노라마다.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하다”고 적혀 있는 정상석을 꼭 안아 보았다. 벗들과 기념사진을 남기고 천왕봉 천년바위에 걸쳐 앉아 자연의 힘과 기운을 얻어 본다. 고교동기회장 병생이는 졸업 40주년 행사 염원이 담긴 현수막까지 가져와 펼친다. 그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이제 하산길이다. 아직도 성취감에 취하기에는 견뎌내야 할 끔찍한 내리막길이 남아있다. 중산리까지 내리막길은 길고 급하다. 천왕봉에서 10분 내려서면 해발 1800m 길가 바위틈에서 나오는 석간수 천왕샘이 있어 목을 축이고 법계사를 지나 로타리 대피소에 닿았다.

[사진=이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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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호흡을 고른다. 중산리까진 3.4km 남아있는 지점이다. 여기서 좌측길은 순두류로, 우측길은 칼바위로 가는 길로 나뉜다. 우리는 우측길을 택했다. 이어지는 돌계단은 무릎을 압박해 오고 언제나 끝이 나려는지 지리산에 갇혀버린 듯하다. 무념무상 인내를 되뇌이는 사이 발길은 어느덧 칼바위 삼거리에 닿고 청정한 계곡물을 만난다. 계곡길을 따라 내려서면 마지막 하산을 알리는 중산리 탐방 안내소에 도착한다. 종주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다.

[사진=이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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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리 버스정류소 옆 식당으로 들어가 하산주를 마시며 숨통을 죄어오던 긴 산행을 돌아다 본다. 민족의 영산 지리산 산행은 자신을 성찰해보며 다듬었던 시간이 된듯하다. 나를 더 단단하고 더 넓어지게 만든 원동력이 된 셈이다. 거친 호흡을 함께한 친구들과 귀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멋진 친구들과 중년의 고개를 넘어가고 있음이 참 다행스럽다.

오후 햇살은 비스듬히 몸을 누이고 머리 위로 구름이 흐른다. 공기가 청량하다. 도회의 일상사로 각다분해졌던 마음이 절로 순해 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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