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星湖) 이익①…학문과 지식에 대한 사고의 대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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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星湖) 이익①…학문과 지식에 대한 사고의 대전환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3.02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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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㉘
▲ 성호 이익의 초상.

[한정주=역사평론가] 인문학을 공부하다 보면 역사에는 일세(一世)를 지배하는 시대적 추세와 정신사조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사도 마찬가지다.

이와 관련해 필자는 율곡 이이가 살았던 16세기를 ‘사림의 시대’, 우암 송시열이 살았던 17세기를 ‘보수의 시대’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18세기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필자는 이 시기를 ‘혁신의 시대’라고 부르고 싶다. 18세기 100년 동안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 등 모든 방면에서 최대의 화두는 단연 개혁(改革) 혹은 혁신(革新)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성사의 측면에서 볼 때 18세기 조선은 가히 ‘지식혁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기존의 학문과 지식에 대한 사고의 대전환이 일어났다. 이러한 시대적 추세와 정신사조는 세 가지 차원에서 고찰해볼 수 있다.

첫째는 성리학(주자학)만이 유일한 가치이자 학문이라고 여겼던 전통적인 개념의 지식인(사대부)들이 중인 이하의 계층이나 배우고 다루는 ‘잡학(雜學)’이라고 외면하며 배척한 영역들에 새롭게 학문적 가치를 부여하고 공부와 탐구의 중요한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성리학의 세계에서 학문과 지식의 정통은 경학(經學)과 사서(史書)였다. 경학과 사서 이외의 학문은 주변 지식 혹은 사소하고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잡학에 불과했다.

사대부는 유학의 경전이나 성리학서만을 읽고 배우고 연마하고 수행해야 하며 그 밖의 다른 무엇에도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된다. 이들 외에 읽어도 될 만한 서책은 역사서가 허용될 뿐이다.

그런데 성호 이익은 “나는 사람과 만나 대화할 때 일찍이 유학의 학술을 갖고 말하지 않았다. 아무런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는가 하면 자신의 조카이자 제자인 이병휴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너는 이미 실학에 종사하고 있으므로 마땅히 실무에 뜻을 두고 헛된 일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충고까지 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실제 생활에 아무런 이로움도 없는 유학이나 성리학의 고담준론보다는 일상생활에 유용하고 사회현실에 필요한 학문과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실용적인 사고와 현실적인 용도에 바탕을 두고 학문을 해야 한다는 이익의 철학은 유학과 성리학의 경계를 뛰어넘어-당시 사대부들이 외면하고 배척했던-경제·풍속·천문·지리·문화·공예·종교·음악·산학(算學)·과학기술 등 모든 분야로 학문과 지식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평생을 경학과 사서에 파묻혀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세상에 유용하고 백성에 이로운 학문을 공부하고 지식을 탐구하며 정보를 검색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사고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실학’이라고 부르는 이익의 철학이었다.

이익은 이러한 자신의 철학을 담은 학문을 가리켜 ‘사설(僿說)’, 곧 ‘자질구레한 혹은 하찮은 학설이나 이론’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익의 수제자였던 안정복은 이러한 학문을 가리켜 ‘하학(下學)’이라고까지 불렀다.

하학은 공자의 ‘하학(下學)하고 상달(上達)한다’는 말에서 뜻을 취한 것으로 안정복은 하학에 대해 “주변에서 흔하게 보거나 들을 수 있고 실제 생활에 가까운 것을 말한다. 흔하게 보거나 들을 수 있고 가까이 있어서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유용한 도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용도와 공업을 거듭 쌓는데 그치지 않을 뿐이다”라고 밝혔다.

또한 하학을 저속하고 천박하다고 업신여기면서 ‘천인성명(天人性命)’이니 ‘이기사칠(理氣四七)’이니 하는 담론이나 학설만을 고상하다고 여기는 이들을 가리켜 끝내 재기(才器)를 성취하지 못해 학문하지 않은 사람보다 못하다고 힐난했고, 심지어 심학(心學)이나 이학(理學)은 모두 ‘허공에 매달려 있는 빈말(懸空說話)’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둘째는 성리학(주자학)을 성학(聖學)이자 정학(正學)이라고 숭배하면서 중화(中華) 이외 외부 세계의 학문과 지식을 사학(邪學)이라고 비난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탄압하기까지 했던 폐쇄적·보수적인 주자학자들과는 다르게 이익은 서양의 학문과 지식은 물론 종교(천주교)에 대해서도 매우 자유롭고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시대의 변화에도 여전히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던 주자학자들은 자신들이 중화로 숭상하고 섬긴 명나라가 오랑캐인 여진족의 청나라에 멸망당하자 중화의 적통이 조선으로 옮겨왔다는 소중화(小中華)의 이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청나라와 서양의 사상과 문화를 오랑캐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배척과 증오의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에 대해서는 사문(斯文: 주자학)을 어지럽히는 사학(邪學)의 근원이라고 보아 크게 탄압했고, 덩달아 천주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 서양의 지식과 과학기술의 도입까지 거부했다.

그러나 이익은 서양의 천문지리학을 공부하고 수용하면서 오히려 세계를 ‘중화와 오랑캐’로 구분하는 주자학의 화이론적 세계관이 얼마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논리인지를 깨달았다.

화이론적 세계관이 깨지면서 청나라는 선진 학문과 문물의 관문(關門)이고, 서양은 선진 과학기술과 문명을 배울 수 있는 보고(寶庫)가 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이익은 신후담 등 제자들에게 ‘서태(西泰: 마테오 리치)의 학문은 소홀히 여길 수 없다’고 거듭해서 강조했다.

실제 18세기 조선에는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활동한 유럽 출신의 선교사와 학자들이 서양의 학문과 지식을 한문으로 번역해 소개한 다양한 종류의 서적들이 들어와 있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서양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와 한문으로 번역한 서양 서적은 437종이나 된다. 이를 주제별로 살펴보면 종교서가 251종, 지리·지도·언어문자·철학·교육 등 인문과학서가 55종, 수학·천문·생물·의학 등 자연과학서가 131종이다.

종교서적을 제외한 인문·자연과학서가 186종이나 되는데, 이 가운데 100여종이 조선에 유입되었다고 한다(정옥자 외 저, 『정조시대의 문화와 사상』, 돌베개, 1999. p208에서 인용).

이익은 이들 서학서(西學書)를 거의 열람하고 탐독하고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서양 전문가였다. 특히 그는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새로운 세계관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예수회 신부 애유략(艾儒略: 줄리오 알레니)의 『직방외기(職方外紀)』에 발문(跋文)을 썼는가 하면 중국에 최초로 천주교를 선교한 이마두(利瑪竇: 마테오 리치)가 쓴 종교 교리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에 대한 발문(跋文)까지 지었다.

이 글들을 읽어보면 이익이 서양의 최신 학문과 종교를 단순히 독서하는데 그치지 않고 독자적이고 비판적인 해석을 통해 그것의 수용 여부를 따져보고 가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학의 양대 산맥으로 어깨를 나란히 했던 북학파에 대비하여 성호학파를 서학파(西學派)라고 부르는 까닭 역시 바로 모든 방면에 걸쳐 서양의 학문과 지식을 적극적으로 탐독하고 비판적으로 해석하면서 새로운 학풍을 불러 일으켰던 이익의 지적 탐구와 작업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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