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星湖) 이익②…실학(實學)의 산실 ‘성호학파(星湖學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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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星湖) 이익②…실학(實學)의 산실 ‘성호학파(星湖學派)’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3.05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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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㉘
▲ 18세기 중반까지 조선의 학문과 지식을 집대성한 백과사전의 결정체 『성호사설』.

[한정주=역사평론가] 마지막으로 필자가 조선의 18세기를 혁신의 시대, 특히 ‘지식혁명의 시대’라고 부르는 가장 큰 이유는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를 섭렵하고 집대성하겠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적 모험과 여정을 행동에 옮긴 이른바 ‘백과전서파’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잠깐 시선을 세계사로 돌려보자. 18세기 인류의 지성사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지적 작업과 그 성과물은-모든 이들이 알고 있듯이-프랑스 계몽사상가들이 편찬한 『백과전서』(정확한 제목은 『백과전서 또는 과학, 기술, 공예에 관한 합리적 사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세계 백과사전의 대명사로 불리는 영국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역시 18세기 중후반인 1768년 초판이 발행되었다.

동아시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일본에서는 『화한삼재도회』라는 백과사전이 1713년 나왔고, 중국에서는 1728년 모든 분야의 학문과 지식을 총망라한 백과사전이자 고금의 도서를 집대성한 총서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이 간행됐다. 다시 이 『고금도서집성』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1785년에는 『사고전서(四庫全書)』라는 역사상 최고·최대 규모의 총서를 완성하였다.

그렇다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왜 18세기에 이렇듯 백과사전이 대거 등장하고 대유행을 이루었을까?

그것은 18세기에 들어와 이전까지 지식인들을 강력하게 지배했던 전통적인 세계관이 몰락하고 기존의 정치·지식 권력이 급속하게 쇠퇴하거나 붕괴하면서 새로운 학문과 지식을 추구하는 거대한 흐름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에서는 ‘화이론적 세계관’이 몰락하면서 유학 혹은 성리학이라는 정치·지식 권력이 쇠퇴했고 유럽에서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붕괴되면서 종교와 신학의 정치·지식 권력이 힘을 잃었다.

그리고 이 폐허 속에서 새롭게 등장한 학문과 사상 그리고 최신의 지식과 정보, 특히 일상생활과 관련된 실용적인 지식과 혁신적인 산업 및 과학기술을 모두 아울러 집대성하기에 가장 적합한 저술 형태가 바로 ‘백과사전’이었다.

이익은 40세를 전후한 시기부터 책을 읽고 사색을 통해 얻거나 제자들과 질문하고 답변한 수많은 내용들을 기록해 두었다.

이익의 나이 80세가 되었을 때 집안의 조카이자 제자들이 이 기록들을 정리해 책으로 편찬했고, 이익은 여기에다가 『성호사설(星湖僿說)』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책은 앞서 언급한 이익의 새로운 철학을 담은 학문과 지식인 ‘사설(僿說)’을 종합하고 집대성해놓은 백과사전이었다.

여기에는 천지(天地: 천문·지리·강역)와 만물(萬物: 의식주·곤충 및 동·식물)에서부터 인사(人事: 인간 사회 및 학문·사상)와 경사(經史: 경학과 역사서)와 시문(詩文: 시와 문장 비평) 등에 이르기까지 총 3007항목의 학문 및 지식에 관한 이익의 해석과 설명이 실려있다.

『성호사설』은 고대로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조선의 학문과 지식은 물론 외부 세계로부터 조선에 들어온 모든 지식과 정보를 집대성한 백과사전의 결정체였다.

안정복 역시 ‘백과사전파’의 일원이었다. 안정복은 스승 이익의 뜻을 받들어 『성호사설』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다시 뽑아 엮은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을 편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 또한 백과사전 류의 서책을 남겼다.

잡동사니와 같은 잡다한 지식과 정보를 모아놓았다고 해서 스스로 『잡동산이(雜同散異)』라고 이름 붙인 안정복의 책에는 경학(經學)과 조선 및 중국의 각종 제도·기록 및 문헌, 사물의 명칭이나 도수(度數), 백성의 일상생활이나 야담 및 야화 등이 실려 있다.

이익의 ‘사설(僿說)’에 견줄 수 있는 안정복의 ‘하학(下學)’의 성과물이 다름 아닌 『잡동산이』였다.

▲ 성호학파를 대표하는 안정복(왼쪽)과 정약용.

이렇듯 이익과 안정복은 사제지간으로 18세기 ‘지식혁명’을 선도한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이익이 이룩한 거대한 지적 탐구와 작업의 결과물은 그의 직전 제자와 그를 사숙(私淑)한 제자들에게 전승되어 실학의 최대 학파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성호학파’를 형성했다.

남인 계열이 중추를 이룬 성호학파는 그 인적 규모와 역량 면에서 노론 계열의 북학파를 능가했고 소론 계열의 실학파를 대표하는 달성(達城) 서씨(徐氏) 가문(서명응·서호수·서유구 등)을 압도했다.

이익을 따라 배운 제자들의 구성은 혈족인 여주(驪州) 이씨 가문 출신의 제자들, 안정복과 같은 가계(家系) 이외의 제자들, 정약용처럼 이익이 사망한 후 사숙한 제자들로 나누어 살펴보아야 할 만큼 그 수가 많다.

정약용이 쓴 이가환의 묘지명인 ‘정헌묘지명(貞軒墓誌銘)’에 따르면 이익의 아들인 이맹휴는 실용적인 학문에 뛰어났고 조카인 이용휴와 이만휴는 각각 천문학과 문학 그리고 경제학에 밝았다. 그리고 손자뻘인 이중환은 지리학, 이가환은 역사학과 서학, 이철환은 박물학(백과사전)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외에 안정복은 역사학, 황운대는 천문학, 윤동규는 지리학, 신후담은 문학, 권철신은 경학으로 명성을 떨쳤다.

마지막으로 이익을 사숙한 제자로는 실학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받는 대학자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 그리고 사실주의 문학을 창달했다고 평가받는 이학규 등이 있다.

하나같이 당대는 물론 사후까지 실학의 각 분야에서 대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들이다.

학자들이 이익을 가리켜 ‘실학의 마르지 않는 샘’ 혹은 ‘실학의 무수한 별들을 길러낸 거대한 호수’라고 한 말이 결코 허장성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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