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암(順菴) 안정복②…예학(禮學)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삶과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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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順菴) 안정복②…예학(禮學)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삶과 철학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3.19 10: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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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㉙
▲ 안정복의 문집인 『순암집』.

[한정주=역사평론가] 1746년 나이 35세 때 안산 첨성촌 성호 가의 성호장으로 이익을 찾아가 사제의 인연을 맺은 안정복은 중년에 접어든 1757년(나이 46세) 스승에게 ‘순암’이라 이름붙인 집의 모양새와 그 뜻을 설명한 다음 그곳에 걸어놓고 죽을 때까지 외우면서 자신을 성찰할 수 있도록 ‘기문(記文)’과 ‘암명(菴銘)’을 지어달라고 청했다.

“집의 제도와 모양은 ‘암(菴)’자의 형상에 따라 지었습니다. ‘암(菴)’자를 살펴보면 ‘초(艸)’는 띠풀로 지붕을 이은 것을 뜻하고, ‘일(一)’은 가로지른 대들보를 뜻하고, ‘인(人)’은 빙 두른 기둥을 뜻하고, ‘전(电)’은 가운데 기둥 하나를 세우고 네 칸의 방을 이루고 있는 형상입니다.

기둥이 두 개이면 여섯 칸이 되고, 기둥이 세 개이면 여덟 칸이 되어 그 쓰임새가 더욱 넓어지게 됩니다.

앞쪽의 두 칸은 방으로 만들어 거처하면서 ‘순암(順菴)’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이것은 대개 그 글자를 취해 이름을 붙인 것이고, 천하의 모든 일은 오직 순리일 뿐이라는 뜻을 새긴 것입니다.

가운데 한 칸은 당(堂)으로 꾸며 일을 보는 곳으로 삼았습니다. 띠풀로 지붕을 잇고 흙으로 만든 집에서 밭을 갈고 나무를 하고 베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으면서 시를 외우고 책을 읽고 지냅니다.

제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당(堂)의 이름을 ‘분의당(分宜堂)’이라고 붙였습니다.

또한 하나의 문을 막아 방으로 꾸미고 이름을 ‘담숙실(湛肅室)’이라고 하였는데, 제사지낼 때 재계(齋戒)하는 곳으로 삼았습니다.

뒤쪽으로는 세 칸을 넓혀서 기물(器物)을 거두어 저장하는 곳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동북쪽의 한 칸은 가묘(家廟)를 봉안하였습니다.

선생님께 당기(堂記)와 암명(菴銘)을 얻어 죽을 때까지 마음속으로 외우고 생각할 자료로 삼고자 합니다. 『순암집』, ‘순암선생연보(順菴先生年譜)’

제자 안정복의 간곡한 청을 받은 이익은 그 즉시 “암기(菴記)를 지어서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후 자세하게 소개하겠지만 안정복은 이익이 세상을 떠난 후 유학의 경전 해석과 서학 및 천주교의 수용 여부를 둘러싸고 성호학파가 우파와 좌파로 갈라설 때 우파의 수장 역할을 했다.

그런데 우파는 경전 해석에 보수적이었고 서학과 천주교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못해 배타적이었다.

일찍이 안정복은 스승 이익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서양의 학술을 가리켜 이단(異端)의 학문이라고 맹렬하게 비난한 적이 있다. 서태(西太: 마테오 리치)의 학문은 소홀히 여길 수 없다고 했던 이익의 유지(遺志)와는 어울리지 않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태도였다.

“최근 서양의 서적을 보았습니다. 비록 그 말이 정밀하고 학설은 확실했지만 종국에는 역시 이단(異端)의 학문이었습니다.

우리 유학자들이 자신의 몸을 닦고 본성을 기르며 선(善)을 행하고 악(惡)을 제거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털끝만치도 이 몸이 죽은 후에 복(福)을 바라는 마음이 없습니다.

반면 서학(西學)은 자신의 몸을 닦는 목적이 오로지 죽은 후 천당의 심판을 받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유학과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큰 이유가 됩니다.” 『순암집』, ‘순암선생연보’

이렇게 보면 안정복은 스스로 ‘하늘과 바다처럼 깊고 넓다’고 한 이익의 학문과 지식 세계 중 가장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성향을 전수받아 계승했다고 하겠다.

‘순암’이라는 그의 호에서는 이렇듯 서학에 대해 배타적이면서 유학의 여러 분야 중 가장 보수적인 성격을 띠는 예학(禮學)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삶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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