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와 족제비와 벼룩…“자연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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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와 족제비와 벼룩…“자연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3.24 07: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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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㊴
 

[한정주=역사평론가] 한 마리 쥐가 닭장 안으로 침입했다. 네 발로 계란을 안고 눕는다. 다른 쥐 한 마리가 그 꼬리를 물고 끌어당겨서 닭장 밖으로 떨어뜨린다. 곧장 다시 꼬리를 물어 당겨서 쥐구멍으로 옮긴다.

또한 병 안에 기름이나 꿀이 있으면 병에 올라가 쭈그리고 앉는다. 꼬리를 병 안으로 깊숙하게 집어넣어 기름이나 꿀을 묻힌 뒤에 몸을 돌려 그 꼬리를 핥거나 빨아 먹는다.

한 마리 족제비가 온몸에 진흙을 발라 더럽기 짝이 없다. 어디가 머리이고 어디가 꼬리인지 조차 분간하기 어렵다. 앞발 두 개를 모으고 밭둑에 서 있는 사람처럼 하고 있다. 마치 썩은 말뚝의 형상과 같다.

다른 족제비 한 마리가 눈을 감고 마치 죽은 듯 그 아래에 뻣뻣하게 누워 있다. 그때 까치가 와서 살펴보고 족제비가 죽은 줄 알고 부리로 한 번 찍어본다.

그런데 족제비가 꿈틀대며 움직이면 까치는 살아 있는 줄 의심하여 재빨리 날아올라 썩은 말뚝처럼 서 있는 다른 족제비 위에 내려앉는다. 그 순간 족제비는 입을 벌려 까치의 발을 문다. 까치는 비로소 자신이 족제비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벼룩이 온몸을 물면 곧장 나무토막 하나를 입에 물고 먼저 시냇물에 꼬리를 담근다. 벼룩은 물을 피해 족제비의 허리와 등 쪽으로 모여든다. 물에 담그면 피하고 다시 물에 담그면 피한다. 점차 목덜미까지 물속으로 집어넣는다.

벼룩은 마지막으로 족제비에 입에 물고 있는 나무토막으로 모인다. 그러면 족제비는 나무토막을 물에 버리고 언덕으로 뛰어오른다.

누가 가르쳐 주었겠는가? 본래 언어로 서로 일러준 것도 없다.

가령 한 마리 쥐가 계란을 안고 눕는다고 해도 어찌 다른 쥐가 그 꼬리를 물고 끌어당길 줄 안단 말인가?

한 마리 족제비가 썩은 말뚝처럼 서 있다고 해도 어찌 다른 족제비가 죽은 듯 그 아래에 뻣뻣하게 누울 줄 안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자연이 아니겠는가. (재번역)

一鼠入雞窠中 四足仰抱雞卵而卧 一鼠啣其尾曵之墜于窠外 則仍又啣其尾曵之輸于穴 甁有油或蜜 蹲于甁 以尾探入于中 塗之以出 回身舐其尾 一黃鼠渾身塗濁泥 不辨首尾 縮前二足 人立于田畔如朽狀 一黃鼠瞑目屛氣 僵卧于其下 有鵲來窺 以爲死一啄之 故蠢動 則鵲疑躍而坐于朽杙 朽杙開口噉其足 鵲始知坐于黃鼠之首也 渾身蚤咀 廼啣一木 先沉尾于溪 蚤避水萃于腰脊 隨沉隨避 涔涔沒項 蚤盡集于木 然後捨木於水 騰身於岸 孰敎之乎 本無言語相曉 假使一鼠抱卵卧 其一安知啣其尾乎 一黃鼠作杙立 其一安知僵其身乎 是豈非自然乎. 『이목구심서 1』

자연이란 누가 가르치거나 깨우쳐준 것도 아닌데 제각기 나름의 방식을 찾아서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한다.

니체의 표현을 빌자면, 자연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이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자연이다.

쥐와 족제비와 벼룩의 습성과 행태 속에서 다시 한 번 자연을 배운다. 특별하지 않는 것에서 특별한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일상의 재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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