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득(自得)…앎·진리·깨달음 향해 나아가는 인간 인식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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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득(自得)…앎·진리·깨달음 향해 나아가는 인간 인식의 한계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3.29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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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㊹
 

[한정주=역사평론가] 또한 정신이 맑을 때 한 송이 꽃과 한 포기 풀과 한 덩어리 돌과 한 사발 물과 한 마리 새 와 한 마리 물고기를 조용하게 관찰한다.

즉시 가슴속에 연기가 무성하게 피어오르고 구름이 가득 일어난다.

마치 기분 좋게 자득(自得)한 것이 있는 것 같다가 다시 자득(自得)한 곳을 깨달아 알려고 하면 도리어 아득해지고 만다. (재번역)

且精神好時 一花一草一石一水一禽一魚靜觀 則胷中烟勃雲蓊 若有欣然自得者 復理會自得處 則却茫然矣. 『이목구심서 2』

‘돈오점수(頓悟漸修)’ 혹은 ‘돈오돈수(頓悟頓修)’라는 말이 있다. 선가(禪家)의 용어이지만 삶과 글, 학문과 독서 등 세상 모든 일의 이치에 적용할 만하다.

‘돈오점수’는 단박에 깨우치고 점진적으로 닦는다는 말이다.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수행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돈오돈수’는 단박에 깨달음을 얻고 단박에 닦는다는 뜻이다. 단박에 깨달음을 얻어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전자가 깨달음이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수행을 해야 한다는 말이라면, 후자는 한 번의 깨달음만으로도 수행이 완성된다는 말이다.

‘돈오점수’가 옳은지 ‘돈오돈수’가 옳은지에 대한 논쟁은 천 여 년을 넘게 이어져 온 문제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판정하는 것은 불필요할 일인 것 같다.

다만 깨달음을 ‘진리’의 문제로 옮겨와 생각해 보면 단 한 번의 깨우침으로 인간 세계와 우주 만물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누군가 이야기한다면 나는 사기꾼이라고 실컷 욕을 퍼부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앎’이란 안다는 것, 다시 안다는 것 밖의 모르는 것, 또 다시 안다는 것, 다시 안다는 것 밖의 모르는 것이 끝없이 돌고 도는 영원회귀와도 같다.

마찬가지로 진리는 진리임을 아는 순간 더 이상 진리가 아니고, 깨달음 역시 깨달음을 얻는 순간 더 이상 깨달음이 아니다.

‘진리’ 역시 참된 이치의 인식, 다시 인식 밖의 무지(無知), 또 다시 인식, 다시 인식 밖의 무지가 끝없이 돌고 돈다. 깨달음 역시 무지몽매함, 다시 깨달음, 또 다시 깨달음 밖의 무지몽매함, 다시 깨달음이 돌고 돈다.

누구나 앎과 진리와 깨달음을 향해 무한정(無限定) 나아갈 뿐 그 끝이 어디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앎과 진리와 깨달음이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꽃과 풀과 돌과 물과 새와 고기를 관찰하다가 만물의 이치를 자득(自得)했다가도 다시 스스로 터득한 것을 이해하려고 하면 오히려 아득해지고 만다는 이덕무의 말은 앎과 진리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진솔하게 표현한 것이다.

세상의 진리를 모두 알고 천하의 이치를 모두 깨우쳤다고 떠들어대는 것은 지적 사기꾼들의 허풍에 불과하다. 이덕무의 말과 사기꾼의 허풍 중 어떤 것이 더 가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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