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꽃 붉은 물결…“스스로 자연의 모습으로 온화함을 즐기니 태평세월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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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꽃 붉은 물결…“스스로 자연의 모습으로 온화함을 즐기니 태평세월이 따로 없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4.11 14: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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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57)
 

[한정주=역사평론가] 3월 푸른 계곡에 비가 개고 햇빛은 따사롭게 비춰 복숭아꽃 붉은 물결이 언덕에 넘쳐 출렁인다.

오색 빛 작은 붕어가 지느러미를 재빨리 놀리지 못한 채 마름 사이를 헤엄치다가 더러 거꾸로 섰다가 더러 옆으로 눕기도 한다. 물 밖으로 주둥아리를 내밀며 아가마를 벌름벌름하니 참으로 진기한 풍경이로다.

따사로운 모래는 맑고 깨끗해 온갖 물새 떼가 서로 서로 짝을 지어서 혹 금석(錦石)에 앉고, 혹 꽃나무에서 지저귀고, 혹 날개를 문지르고, 혹 모래를 끼얹고, 혹 자신의 그림자를 물에 비춰본다.

스스로 자연의 모습으로 온화함을 즐기니 태평세월이 따로 없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웃음 속에 감춘 칼과 마음속에 품은 화살과 가슴속 가득 찬 가시가 한순간에 사라짐을 느낀다.

항상 나의 뜻을 3월의 복숭아꽃 물결처럼 하면 물고기의 활력과 새들의 자연스러움이 내게 모나지 않은 온화한 마음을 갖도록 도와줄 것이다.(재번역)

三月靑谿 時雨新晴 日色怡煕 桃花紅浪 㶑灧齊岸 五色小鯽魚 不能猛鼓其鬐 游泳荇藻間 或倒立 或橫翻 或吻出于浪 細呷粼粼 眞機之至 猜快恬然 暖沙潔凈 鵁鶄鸂鶒輩 二二四四 或垂錦石 或喋芳芷 或刷翎 或浴沙 或照影 自愛天態穆穆 無非唐天虞日之氣像 笑中之刀 攢心之萬箭 胷中之三斗棘 掃除之快 不留一纖翳 常以吾意思 爲三月桃花浪 則魚鳥之活潑 自然助吾順適之心.『선귤당농소』

18세기는 ‘진경시대(眞景時代)’의 전성기였다. 간송미술관의 최완수씨는 “진경시대라는 것은 조선 왕조 후기 문화가 조선 고유색을 한껏 드러내면서 난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던 문화절정기를 일컫는 문화사적인 시대 구분 명칭이다”라고 정의했다.

이 진경시대를 움직인 양대 축이 다름 아닌 ‘진경산수화’와 ‘진경 시문’이다. 붓을 갖고서 보고 느낀 그대로 진경을 표현하고 묘사하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나 글을 짓는 문장가나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화의 대가였다면, 진경 시문의 대가는 이덕무였다. 이덕무는 그림은 시문이고, 시문은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그림과 시문을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다른 가지로 보았다.

그림과 시문을 동일한 맥락에서 바라본 이덕무의 미학은 이러한 말에 집약되어 있다.

“그림을 그리면서 시의 뜻을 모르면 색칠의 조화를 잃게 되고 시를 읊으면서 그림의 뜻을 모르면 시의 맥락이 막히게 된다.”

글을 읽을 때 그림이 그려지면, 그 시문은 진실로 좋은 글이다. 글이란 ‘마음으로 그리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치로 그림을 볼 때 글이 떠오르면, 그 그림은 참으로 훌륭한 그림이다. 이러한 까닭에 옛 그림에는 반드시 화제(畵題)나 발문(跋文)이 있었다. 글을 쓰듯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듯 글을 써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글은 어떤가? 마치 복숭아 꽃 물결과 오색 빛깔의 붕어와 물새 떼가 연출하는 진기한 풍경이 그림처럼 다가오지 않는가! 자연을 관찰하다가 자연에 동화(同化)되는 바로 그 순간, 자연이 내가 되고 내가 자연이 된다.

자연과 내가 한 몸이 될 때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면 진솔해지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되고, 자연스럽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자연스럽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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