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주=역사평론가] 자(字)는 휘조(輝祖). 남인 명문가인 여주 이씨 출신으로 성호학파의 스승 이익과 한 집안 사람이다.
친족 관계상 이중환은 이익의 재종손(再從孫)이었기 때문에 사상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이익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나이 24세 때인 1713년(숙종 39년)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올랐지만 왕위계승을 둘러싼 남인과 노론·소론의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 1726년(영조 2년) 나이 37세 때 절도(絶島)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유배지에서 풀려났지만 사헌부의 탄핵으로 다시 절도로 유배당했다.
그리고 유배형에서 벗어난 뒤로는 노론 일색인 세상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지역의 교통, 경제, 지리, 풍속, 문화, 인물 등을 수집하고 정리해 『택리지(擇里志)』를 저술했다.
그의 호 역시 전국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가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땅을 골라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한반도의 중북부에 해당하는 충북 괴산군과 경북 상주시와 경북 문경시 등 3개 시군에 걸쳐 있는 청화산(靑華山)이라는 이름의 산이 있다.
2004년 발행된 『상주지명총람』에는 이중환이 이 산을 좋아해 여러 해 동안 머물렀고 자신의 호까지 ‘청화산인(靑華山人)’으로 지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실제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청화산은 그 형세가 좋고 기운이 빼어난 복지(福地)’라고 하면서 이곳이 자신의 마음을 빼앗은 길한 땅임을 암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이중환의 호는 ‘청담(淸潭)’, ‘청화산인(靑華山人)’, ‘청화자(靑華子)’ 등인데 ‘청화산인’과 ‘청화자’라는 호에서는 쉽게 청화산을 연상할 수 있다.
‘맑은 못’을 뜻하는 ‘청담(淸潭)’이라는 호 역시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그곳의 계곡은 물이 맑고 경치가 빼어나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청화산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