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헌(湛軒) 홍대용②…청나라 지식인들이 탄복한 삶과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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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湛軒) 홍대용②…청나라 지식인들이 탄복한 삶과 철학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4.1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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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㉛
▲ 김양기의 송하모정도((松下茅亭圖). <호암미술관 소장>

[한정주=역사평론가] 어쨌든 홍대용은 1766년 2월 초2일 첫 만남을 가진 후 한 달 동안에 무려 일곱 차례나 이들 청나라의 지식인들을 만났다.

이 일곱 차례의 만남에서 홍대용은 당시 자신이 거처하고 있던 수촌 마을의 집 ‘담헌’을 청나라의 벗들에게 자세히 소개하면서 평소 자신이 꿈꾸었던 삶과 철학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이때가 첫 만남을 가진 지 불과 사흘이 지난 2월 초5일이었으니까 이들이 얼마나 급속하게 가까워졌고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었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말은 비록 통하지 않았지만 모두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공용문자였던 한자(漢字)에 능통했기 때문에 의사소통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이러한 까닭에 홍대용과 청나라의 지식인들은 짧은 시간 안에 그토록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홍대용은 자신이 담헌에 머물면서 한 일을 ‘여덟 가지’로 정리해 청나라의 벗들에게 보여주었다. ‘팔경소지(八景小識)’라고 제목을 붙인 여덟 가지 일은 다음과 같다.

“향산루(響山樓)에서 거문고를 탄다(山樓鼓琴) / 농수각(籠水閣)에서 자명종이 울린다(島閣鳴鐘) / 일감소(一鑑沼)에서 물고기를 본다(鑑沼觀魚) / 보허교(步虛橋)에서 달을 희롱한다(虛橋弄月) / 태을연(太乙蓮)을 타고 신선을 배운다(蓮舫學仙) / 선기옥형(璇璣玉衡: 혼천의)으로 하늘을 엿본다(玉衡窺天) / 영조감(靈照龕)에서 시초(蓍草)를 점친다(靈龕占蓍) / 지구단(志彀壇)에서 화살을 쏜다(彀壇射鵠)”. 『을병연행록』, 1766년 2월 초5일

그리고 이어진 글에서 홍대용은 담헌이라는 집의 제도(制度)와 함께 마치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이들 팔경을 하나하나 자세하고 정밀하게 묘사했고, 아울러 그곳에 담긴 자신의 뜻까지 설명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찍이 스스로 “과거에 대한 뜻을 버리고 명예와 이욕의 마음을 끊은 채 한가롭게 들어앉아 향을 피우고 거문고를 타면서 속세를 벗어난 삶”을 살았던 은사(隱士) 홍대용과 더불어 세계와 천체의 원리를 직접 배우고 익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몸소 과학 기구를 제작하고 실험했던 과학자 홍대용의 행적을 엿볼 수 있다.

“집의 제도는 사면 두 칸입니다. 가운데가 한 칸 방이고, 북쪽으로 반 칸 작은 방이고, 동쪽으로 반 칸 다락은 두 칸 길이고, 서남쪽 두 편은 모두 반 칸으로 마루를 만들었습니다. 이 집이 바로 담헌(湛軒)입니다.

서쪽으로는 두 칸 길이고, 남쪽으로는 다락 아래에서 그쳤습니다. 사면에 두어 칸 뜰이 있고 남쪽으로 네모난 모양의 연못이 있는데 사방이 여남은 걸음에 이릅니다. 연못의 깊이는 가히 배를 띄울 수 있는데 그 가운데에 둥근 섬을 쌓았으니 둘레가 여남은 걸음입니다.

연못 위 둥근 섬에는 작은 집을 세워 혼천의(渾天儀)를 감추었습니다. 연못가에는 약간의 꽃과 나무를 심고 사면으로 담을 둘렀습니다. 이것이 집 제도의 대강입니다.

동편 다락에는 두어 폭 산수 그림을 붙이고 책상 위에는 두어 장의 거문고를 놓았으니 주인이 스스로 타는 악기입니다. 다락의 이름을 ‘향산루(響山樓)’라고 붙였는데, 이것은 종소문(宗少文)의 ‘거문고를 타 그림 가운데 산을 울리게 한다’는 말에서 취한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산루고금(山樓鼓琴 : 향산루에서 거문고를 탄다)’이라고 적은 것입니다.

연못 가운데 섬 위의 집은 ‘농수각(籠水閣)’이라고 이름 하였는데, 이것은 두보(杜甫)의 ‘해와 달은 우리 가운데 새요, 하늘과 땅은 물 위의 영취(靈趣)이네’라는 글귀를 취한 것입니다. 이 농수각에 감춘 혼천의에는 시각을 알리는 종이 있고 또한 자명종이 있어 때를 따라 스스로 우는 까닭에 ‘도각명종(島閣鳴鐘 : 농수각에서 자명종이 울린다)’이라고 적은 것입니다.

연못은 산을 인도하여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산과 수풀이 물 가운데 비쳐 온갖 형상이 짐짓 면목을 감추지 아니했으니 ‘일감호(一鑑湖)’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것은 주자(朱子)의 ‘반 이랑 연못이 한 거울에 열리다’라는 글귀에서 취한 것입니다.

물고기를 길러 연못에 가득해 꼬리를 흔들고 물결을 뿜어 수초(水草) 사이에서 뛰노니, 이 모습을 즐겨 구경하다 보면 혼탁한 세상의 기틀을 잊기에 족합니다. 그래서 ‘감소관어(鑑沼觀魚: 일감소에서 물고기를 본다)’라고 적은 것입니다.

연못의 북쪽 언덕에 남쪽으로 다리를 만들어서 섬과 통하게 하고 ‘보허교(步虛橋)’라고 이름 하였습니다. 매양 바람이 자고 물결이 고요하여 하늘과 구름의 기운이 물속에서 날아오르는 듯하고, 밤이 되면 달빛이 그림자를 떨쳐 기이한 물결이 하늘과 한빛이 되곤 합니다. 사람이 다리 위에 올라 아래를 굽어보면 환하게 밝아 웅장한 무지개를 타고 하늘 위를 오르는 듯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허교농월(虛橋弄月 : 보허교에서 달을 희롱한다)’이라 적은 것입니다.

나무를 깎아 배를 만들었지만 겨우 두 사람을 용납할 뿐입니다. 한 머리는 둥글고 높아서 약간 채색을 베풀어 연꽃 형상을 만듭니다. 그래서 ‘태을연(太乙蓮)’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것은 신선인 태을진인(太乙眞人)의 연엽주(蓮葉舟)를 모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방학선(蓮舫學仙: 태을연을 타고 신선을 배운다)’이라고 적은 것입니다.

혼천의 제도는 근본적으로 선기옥형(璇璣玉衡)의 제도를 모방하였고, 일월(日月)이 다니는 길과 성신(星辰)의 도수(度數)를 앉아서 상고할 만합니다. 그래서 ‘옥형규천(玉衡窺天: 선기옥형으로 하늘을 엿본다)’이라고 적은 것입니다.

다락 북편에 조그만 감실(龕室)을 만들어 시초(蓍草)를 넣어 두는 곳으로 삼고 ‘영조감(靈照龕)’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것은 옛글의 ‘영명(靈明)이 위에 있어 비친다’는 글귀에서 취한 것입니다. 당초 의심을 끊어내고자 하면 반드시 마음을 깨끗이 하고 경계하며 점(占)하는 법에 의지하여 『주역(周易)』의 괘사(卦辭)를 구합니다. 그러므로 ‘영감점시(靈龕占蓍: 영조감에서 시초를 점친다)’라고 적은 것입니다.

연못 동편에 돌을 쌓아 단(壇)을 올리고 활을 쏘는 곳으로 삼아 ‘지구단(志彀壇)’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것은 맹자의 말씀에서 취한 것입니다. 글을 읽고 농사를 짓는 일에 틈이 생기면 사람들과 더불어 짝을 나누고 승부를 다투어 서로 즐깁니다. 이러한 까닭에 ‘구단사곡(彀壇射鵠 : 지구단에서 화살을 쏜다)’이라고 적은 것입니다.” 『을병연행록』, 1766년 2월 초5일

▲ 18세기 후반 청나라 연경에 파견된 조선사절단의 활동을 상세히 묘사한 ‘연행도’. 제13폭에연경 유리창의 화려한 가게들과 번화한 거리를 묘사한 그림이 있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아울러 당시 홍대용은 청나라의 벗들에게 자신의 집이자 호인 ‘담헌’에 관한 글을 각각 하나씩 지어달라고 청했는데, 엄성에게는 ‘담헌팔경시(湛軒八景詩)’을, 반정균에게는 ‘담헌기(湛軒記)’를 부탁했다.

홍대용은 두 사람에게 글을 부탁하면서 정침(頂針: 경계)으로 삼고자 한다면서 절대 “빈 과장이나 지나친 칭찬 그리고 문인들이 흔히 쓰는 상투적인 표현이나 글을 꾸미는 일 따위는 하지 말아달라”고 특별하게 요청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엄성이 쓴 시와 반정균의 기문은 ‘담헌’에 살면서 홍대용이 어떤 일을 했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하고도 정확한 자료가 된다. 지면 관계상 엄성의 시는 생략하고 반정균의 기문만 읽어보도록 하겠다.

“연경(燕京) 동쪽에 방외(方外)의 나라가 있다. 그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일컫는데, 그 나라의 풍속이 예절을 숭상하고 시율(詩律)을 일삼아 당나라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율을 모으는 사람이 왕왕 있어서 다른 외국에 비할 바가 아니다.

병술년(丙戌年: 1766년) 봄 사이에 내가 일이 있어서 북경에 이르렀더니 마침 담헌 홍군이 조공하는 사신을 따라 들어와 있었다. 대개 중국 성인의 학문을 흠모하고 한번 중국의 기이하고 특출한 선비를 사귀고자 하여 수천 리 먼 곳을 찾아오는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았다.

내 이름을 듣게 되자 즉시 나의 객관(客館)에 이르러 주인과 손님이 각각 붓을 들어 뜻을 통하고 도리와 의리로 서로 경계하여 군자가 벗을 사귀는 도를 이루었다. 이러한 일은 진실로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

홍군은 기상이 높고 문선(文選)이 넓어서 중국의 서적을 열어보지 않은 것이 없고, 율력(律曆)과 병법(兵法)과 도학(道學)의 종지(宗旨)를 궁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시문(詩文)으로부터 산수(算數)에 이르기까지 능숙하지 못한 것이 없고, 의론(議論)을 듣게 되면 옛사람을 일컫고, 의리를 근본으로 하여 짐짓 유자(儒者)의 기상이 있다. 이것은 중국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인품이거늘 어찌 진한(辰韓)의 멀고 황량한 지경에서 얻을 줄을 알았겠는가.

홍군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도(王都)에 사는 사람이지만 평생에 벼슬을 원하지 아니하여 물러나 청주(淸州)의 수촌(壽村)에 거처하면서 농사짓는 백성들과 더불어 한가지로 살았습니다. 몇 칸 초옥을 지어 방과 다락을 갖추고, 집 앞에는 연못을 파서 못 위에 다리를 놓고, 못 가운데에는 조그만 배를 물결에 띄우고, 다락 밖으로는 나무 그림자가 뜰에 가득하고, 당(堂)에 오르게 되면 혼천의로 천문(天文)을 상고하고 자명종으로 시각을 살피고, 거문고로 흥치(興致)를 돋우며, 일이 있으면 시초(蓍草)를 점하여 의심을 끊어내고 결정하며, 겨를을 얻게 되면 활과 화살을 다스려 승부를 다툽니다. 진실로 즐거움이 이 가운데 있으므로 외물(外物)에 의지하여 구하지 않았습니다.

미호(渼湖) 선생은 나의 스승으로 그 집을 이름 하여 담헌(湛軒)이라 일컬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스스로 별호(別號)를 삼았습니다. 그대가 나를 위하여 그 사적(事跡)을 기록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이미 그 사람을 높이 여기고 다시 그 연못과 정자의 경치를 듣게 되었으니 한 번 그곳에 가서 한가지로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을 의논하려고 하지만 몸이 만 리 밖에 있어 마침내 얻지 못할 것이다.

옛적에 외국 사신이 중국에 들어와 예씨(倪氏)의 고사(高士)가 청비각(淸閟閣)을 지은 일을 듣고 보기를 원했으나 얻지 못하게 되자 두 번 절하고 탄식하며 돌아갔다고 하니, 나의 오늘이 가장 가깝고 또한 서로 반대가 된다. 그러나 그 집 이름을 듣게 되었으니 어찌 그 뜻과 마음을 일컫는 것이 없겠는가.

일찍이 들으니 ‘군자의 도는 마음이 어지럽지 아니하고 바깥 사물이 더럽히지 아니하니 그 몸이 맑고 밝으며 그 집은 텅 비어 깨끗하다’고 하였다. 이것이 어찌 ‘담(湛)’이라는 글자의 뜻에 들어맞지 않겠는가.

홍군이 매양 나와 더불어 성리(性理)의 학문을 의논하였는데 그 말이 지극히 순박하고 두터우며 참되니 대개 ‘담(湛)’이라는 글자의 뜻에 깊이 얻는 것이 있다. 내가 비록 재주는 없지만 당초 스스로 군자의 도를 힘써 착한 벗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홍군의 글과 행실(行實)로 중국 선비를 뵙고자 하니 어찌 두어 줄 기문을 사양할 수 있겠는가. 다만 미호선생이 내 말을 듣게 되면 마땅히 어찌 여길 줄을 알지 못하겠다.” 『을병연행록』, 1766년 2월19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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