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헌(湛軒) 홍대용③…담헌에서 꾸었던 과학자의 꿈을 이룬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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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湛軒) 홍대용③…담헌에서 꾸었던 과학자의 꿈을 이룬 선비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4.2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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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㉛
▲ 홍대용이 만든 ‘혼천의’.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연경 유리창 건정동의 만남에서 홍대용과 청나라 지식인들이 나눈 필담(筆談)과 기록을 읽다 보면 필자는 ‘담헌’이라고 이름붙인 집에 거처하면서 세속의 명성과 이욕에 초연했던 은사(隱士) 홍대용의 모습과 동시에 직접 혼천의를 제작해 집에 설치한 다음 매일 천문을 상고하면서 세계와 우주의 원리를 탐구했던 ‘과학자 선비’ 홍대용의 모습이 자꾸 겹쳐서 떠오른다.

그렇다면 당시 과학이나 공업기술 등을 잡학(雜學)이나 잡술(雜術)이라고 업신여기며 중인 신분 이하의 천한 사람이나 취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양반사대부 계급 출신의 홍대용은 어떻게 과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토록 높은 수준의 지식과 견해 그리고 기술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일까?

홍대용의 과학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지식은 특정한 스승에 연원을 두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거나 직접 각종 과학 기구를 제작해 실험해보는 과정을 통해 터득한 ‘자득(自得)’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특히 그는 과학적 식견을 갖춘 기사(奇士)들을 직접 찾아가 만나서 교제를 맺는 방식으로 과학 지식과 기술들을 하나하나씩 쌓아 나갔다.

이러한 과학자 선비 홍대용의 면모를 볼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그의 나이 29세 무렵인 17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아볼 수 있다.

이 해 홍대용은 전라도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나주관아에 머무르고 있었다. 당시 그는 근처 동복(同福 : 전라도 화순) 땅 물염정(勿染亭)에 은거하고 있던 석당(石塘) 나경적을 친히 찾아가 과학기술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나경적과 그의 제자 안처인(安處仁)을 나주관아로 초청해 가르침을 받고 3년여 가까이 공을 들여 과학 기구와 도구 등을 직접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들과 함께 연구하고 작업한 결과물이 천체 관측 기구인 혼천의와 자명종이었다. 홍대용은 수촌 마을의 집 담헌에 사설 천문대라고 할 수 있는 농수각을 세워 이들 기구들을 설치하고 천체 관측과 과학 연구에 활용했다.

앞서 홍대용이 ‘담헌팔경’ 중의 하나로 소개했던 ‘도각명종(島閣鳴鐘: 농수각에서 자명종이 울린다)’과 ‘옥형규천(玉衡窺天: 선기옥형으로 하늘을 엿본다)’이 바로 이러한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기묘년(己卯年: 1759년) 봄 사이에 금성의 관아에 머물다가 동쪽으로 서석산을 구경하고 물염정에 이르러 기이한 선비 한 사람을 만났는데 성은 나(羅)요 이름은 경적(景績)이었다. 세상을 멀리한 채 숨어 지내며 옛일을 좋아하고 나이는 이미 70세가 넘었다.

친히 자명종을 만들어 집에 감추었는데 정교하고 치밀한 제도와 모양이 서양의 기술을 깊이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그 신묘하고 뛰어난 재주를 특별하게 여겨서 더불어 말하며 고금(古今)의 기이한 기계를 의논하니 용미거(龍尾車)로 높은 곳에 물을 올리고 맷돌을 저절로 굴려 움직여 사람의 공을 베풀지 아니한 것이 다 극진히 묘한 이치를 깨치고 있었다.

나중에 말하기를 ‘선기옥형(혼천의)은 요순(堯舜) 때의 귀중한 기물이다. 역대의 제도를 모방하여 기이한 법이 끊어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는 멀리 바다밖에 있어서 기이한 제도를 상상할 곳이 없었다.

내가 분수에 넘치게도 옛 제도에 의지하고 서양의 학설과 기술을 참작하여 우러러 천문(天文)을 상고하고 엎드려 마음으로 생각하였다. 비록 몇 년이 지난 후에 마음속에 대강의 제도를 갖추었지만 집이 가난한 탓에 재물과 노역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서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것이 내 평생의 한(恨)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선기옥형은 후세에 제도를 전하지 못하고 당송(唐宋) 시대 이후로는 각각 혼천의를 만들었다. 그 남은 제도를 모방하되 우리나라는 전할 것이 없으니, 내가 또한 뜻이 있어도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나생(羅生)과 더불어 한가지로 이룰 것을 언약하고 다음해 여름에 그를 초청하여 금성 관아에 이르도록 하였다. 그리고 재물과 공력을 소비하고 재주가 좋은 장인을 불러 두 해를 지나자 대강을 이룰 수 있었다.

다만 도수(度數)에 잘못된 곳이 있고 기물이 뒤섞여 잡된 것이 많았다. 이에 망령된 소견으로 잘못된 곳을 고치고 뒤섞여 잡된 것을 떨쳐내 오직 천문(天文)에 부합하기를 취하였다. 또한 자명종 제도를 모방하여 해와 달로 하여금 하늘의 도수(度數)를 따라 밤낮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한 해를 지난 다음에야 이렇게 하기를 마쳤다.

나생의 제자 가운데 성은 안(安)이고 이름은 처인(處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정밀한 사고와 공교(工巧)한 기술이 깊이 나생의 재주를 얻었다. 무릇 대강의 제도는 오직 나생의 소견을 따르고, 공교한 제작은 오직 안생의 수단으로 이루어졌다. 그 제도의 대강은 쇠로 만들고 안팎에 두 층이 있으니, 각각 세 고리를 만들고 서로 맺어 하늘의 둥근 제도와 모양을 이루었다.

또한 가운데에 둥근 쇠를 걸어 땅의 모양을 형상하고, 사방의 24방위와 사계절에 따라 해와 달이 다니는 길을 표시하고, 둥근 쇠를 붙여 해와 달의 형상을 짐짓 만들어 하루의 길고 짧음과 한달의 현망회삭(弦望晦朔: 상현·하현·보름·그믐·초하루)의 대강을 상고하게 하였다.

또한 따로 하나의 제도를 만들었는데, 세 고리로 서로 맺어 큰 제도의 모양과 다름이 없고, 안층에는 종이를 발라 닭의 알 형상을 이루고, 위에는 자미원(紫薇垣)·태미원(太薇垣)·천시원(天市垣)의 삼원(三垣)과 이십팔수(二十八宿)의 형상을 그리고, 돌리는 법은 큰 제도와 또한 같았다. 여기에는 비록 진짜 해와 달은 없지만 성신도수(星辰度數)를 환히 밝혀 상고함은 큰 제도가 미치지 못할 것이었다.” 『을병연행록』, 1766년 2월24일

▲ 전통적인 우주관에서 벗어나 무한우주의 관념을 제시한 홍대용의 『의산문답』. <실학박물관 소장>

홍대용은 엄성과 반정균보다 뒤늦게 합류해 친교를 맺은 또 다른 청나라의 벗 육비(陸飛)에게는 -앞서 두 사람에게 시나 기문을 부탁했던 것처럼- 따로 자신이 직접 제작한 혼천의와 자명종을 설치해놓은 ‘농수각’에 관한 글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담헌팔경 중 유독 농수각을 따로 뽑아 글을 써달라고 한 까닭은 홍대용이 청나라의 벗들에게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과학 지식과 기술을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홍대용의 과학적 식견과 정교한 기술에 탄복한 육비는 두말 하지 않고 ‘농수각기(籠水閣記)’ 한 편을 선뜻 지어 주었다.

“『서전(書傳)』에서 말하기를 ‘선기옥형을 살펴 칠정(七政: 일월(日月)과 화(火)·수(水)·금(金)·목(木)·토(土)의 오성(五星)을 말함)을 바로 잡는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을 만든 사람은 말하지 않았다.

후세에 하늘을 의론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공교(工巧)한 제작이 있으니 『한서(漢書)』에 적혀 있는 평자(平子)의 묘한 기술이란 이것을 일컫는 말이다. 다만 별을 측량함에 있어서 당우(唐虞: 요순) 시대로부터 주(周)나라에 이르러 이미 여러 도수(度數)를 모으니 당(唐)나라의 중일행(中一行)이 비로소 해로 변하는 법을 정하여 그 말이 더욱 정교하고 치밀해졌다.

청나라의 책력법(冊曆法)이 이전 시대보다 뛰어나지만 정확하고 자세한 산법(算法)을 의논하여 높고 큰 천문(天文)을 살핀 사람은 모두 바다 밖으로부터 왔다. 이것은 천문과 성신(星辰)의 도수(度數)에는 각각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시행하는 사람이 있어서 중국 사람만이 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국(東國)에서 온 담헌 홍처사(洪處士)는 궁구(窮究)하지 않은 서적이 없고, 그밖에 재주와 술업(術業: 산술(算術)과 역법(曆法))에 미쳐서도 각각 미묘한 곳을 얻었다. 그 나라에 나경적이라는 사람이 있어 전라도 동복 땅에 숨어 살면서 천문도수(天文度數)를 깊이 알았다. 그의 제자인 안처인은 스승이 전해준 것을 얻어 공교(工巧)한 생각이 겨룰 사람이 없었다. 두 사람은 모두 기이한 선비다.

담헌이 찾아가서 초청하고 서로 강론하여 옛 제도를 변통(變通)하고, 여러 장인들을 모아서 3년이 지나 혼천의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혼천의를 농수각 가운데 감추고 아침저녁으로 구경하는 것으로 일삼았다. 진실로 두 아름다움이 반드시 합할 것이다. 부지런히 구하고 다스리기를 이와 같이 오로지 한 가지로 또한 오래하였다.

대개 나생과 안생이 담헌을 얻지 못하였다면 그 기이하고 특별한 재주를 펼쳐보지 못하였을 것이고, 담헌이 나생과 안생을 얻지 못하였다면 큰 제도를 마침내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다.

내가 담헌과 더불어 객관(客館)에서 서로 사귐의 도리를 정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담헌이 있음을 알지 못할 것인데, 또한 어찌 나생과 안생을 알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사실로 보자면 천하의 기이하고 특별한 일은 드러나지 않을 수 없고 썩지 않을 사업은 반드시 멀리 전해진다. 한갓 두 사람이 담헌을 만난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 아니라 나 또한 세 사람에게 한가지로 한이 없다.” 『을병연행록』, 1766년 2월27일

이렇듯 혼천의와 같은 천체 관측 도구 등을 직접 제작하고 집안에 설치한 다음 이를 적극 활용해 각종 과학 실험과 연구를 했던 홍대용은 1773년 나이 43세 무렵 그 내용을 종합하고 정리한 『의산문답(毉山問答)』이라는 과학서적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의산문답』에서 홍대용은 실옹(實翁)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지구설(地球說), 지전설(地轉說), 무한우주설(無限宇宙說)과 같은 자신의 과학 지식과 사상을 한껏 펼쳐보였다.

특히 지구는 둥글다는 지구설에 근거해 ‘중화(中華)와 오랑캐가 따로 있지 않다’고 논하면서 모든 나라가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너무나도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 이것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에 빠져 있던 조선의 사대부나 지식인들의 편협한 사고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인식에 일대 경종을 울린 지성사적 쾌거였다.

세계는 둥글고 자전(自轉)하기 때문에 어떻게 기준을 삼느냐에 따라 어느 곳이나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혁신적인 사고는 18세기 조선에 등장한 새로운 세계관과 지식혁명의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서인지 박지원은 1783년 홍대용이 사망한 직후 지은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에서 홍대용의 과학 지식과 탁견(卓見)을 높이 사 과학자로 살았던 그의 모습을 다른 무엇보다 도드라지게 조명했다.

“아! 덕보(德保: 홍대용의 자)는 두루 통달하고 민첩하고 겸손하고 단정하며 높은 식견과 정밀한 견해를 갖추었다. 더욱이 음률(音律)과 역법(曆法)에 탁월한 재주가 있어서 그가 만든 혼천의 등 여러 기구는 오랫동안 생각하고 연구한 것이 쌓여 새롭게 기지(機智)를 발휘한 것이다.

처음에 서양 사람들이 ‘땅이 둥글다는 것(地球)’을 깨우쳤지만 ‘땅이 돈다(地轉)’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덕보는 일찍이 의론하기를 ‘땅이 한 번 돌면 1일이 된다(地一轉爲一日)’고 하였다.

그 설이 지극히 미묘하고 심오했으나 돌이켜보건대 미처 저서(著書)로 남겨놓지 못했다. 그러나 만년에 들어서는 더욱 땅이 돈다는 학설을 자신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연암집』, ‘홍덕보묘지명’

그리고 홍대용은 오늘날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 최고의 과학자이자 과학사상가’로 인정받고 있다. ‘담헌(湛軒)’에서 과학자를 꿈꾸었던 선비의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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