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弘齋) 정조 이산② 정치적 핍박에도 ‘의(毅)’자 아닌 ‘홍(弘)’자 취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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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弘齋) 정조 이산② 정치적 핍박에도 ‘의(毅)’자 아닌 ‘홍(弘)’자 취한 까닭은?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4.28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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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㉜
▲ 정조가 8살이 되기 이전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편지.

[한정주=역사평론가] 그런데 필자는 동궁(왕세손) 시절 ‘홍재’라는 호를 취한 정조의 내면 심리가 무척 궁금하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였던 것도 모자라 자신과 할아버지 영조 사이를 이간질하고 음해해 왕세손의 지위를 박탈하려고 했고, 심지어 암살 시도까지 서슴지 않았던 정적(政敵)들에 둘러싸여 하루하루를 불안과 공포 속에서 보내야 했던 그가 ‘굳센 마음’이 아닌 ‘넓은 도량’을 자신의 길로 선택했다는 것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정조가 왕세손 시절 얼마나 위급하고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죽음을 앞둔 영조가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1775년(영조 51년) 11월20일을 전후한 『영조실록(英祖實錄)』의 내용만 보아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대리청정(代理聽政)에 대한 의론이 일어나자 홍인한 등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 이를 저지시켰으며, 더욱 긴박하게는 안으로는 자신들의 눈과 귀를 배치하고 밖으로는 당여(黨與)를 끌어들여서 혹은 말을 지어내 협박하고 더러는 떠도는 말로 탐지하거나 시험하였다.

… 왕실의 인척으로 이미 부귀가 극도에 이르렀지만 스스로 극악(極惡)한 죄에 빠지는 것을 달갑게 여겼으니, 어찌 하루아침 하루저녁의 일로 이러 했겠는가? 오직 우리 왕세손(정조)께서 타고난 재주와 덕망이 영특하고 밝아서 화를 내지 않는 데도 위엄이 있었기 때문에 두 역적이 평소 이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또한 왕세손께서는 고금(古今)의 치란(治亂)을 환하게 꿰뚫고 계셨고 내척(內戚)과 외척(外戚)의 정치 간섭을 매우 증오하셨기 때문에 두 역적은 마음속으로 이를 우려했던 것이다.

… 두 역적이 역적이 된 이유를 살펴보면 그 원인이 오래되었으니, 이는 유독 법령과 형벌을 다루는 사사(士師)가 된 사람만이 주벌(誅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흉악한 역적 무리가 근거 없이 떠도는 소문을 만들어내 혹은 왕세손이 미행(微行)을 다닌다고 하고 혹은 왕세손이 술을 즐겨 마신다고 하였다.

김중득과 하익룡과 같은 무리는 홍인한의 흉악한 계략을 비밀리에 받아서 진서(眞書)와 언문(諺文)으로 쓴 익명의 글을 존현각(尊賢閣)에 투서했는데, 그 언사가 흉악하고 패악했다.

… 홍인한은 정후겸과 더불어 내간(內間)에서 한 목소리를 일으켜 말하기를 ‘동궁은 처지가 외롭고 위태롭다. 만약 외가(外家)를 후하게 대우하지 않는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또한 윤양후와 윤태연과 같은 무리는 이들의 뒤를 따라 설득하고 회유하여 불령(不逞)한 무리들에게 소개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위엄을 세우니, 그 뿌리와 기반이 단단하게 이루어졌다. 그렇게 하고서 왕세손이 자신들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왕세손은 그들의 상황과 세력을 환히 굽어 살피고 계셨다.

이에 왕세손께서는 그들의 소행을 매우 증오하고 몹시 번민하셨기 때문에 더러 언어(言語)나 안색(顔色) 사이에 드러나곤 하셨다. 이러한 까닭에 이 무리들은 흉악한 계획을 오랫동안 쌓고 있으면서 뉘우칠 줄 몰랐다.

… 왕세손께서 더러 연침(燕寢)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으면 정후겸의 어미 되는 화완옹주는 반드시 사람을 시켜 왕세손을 정탐(偵探)하게 하고 좌우에서 엿보게 하였다. 왕세손께서 혹시 동궁의 벼슬아치들을 불러 무슨 말이나 하지 않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대개 이러한 행동은 정후겸이 종용(慫慂)하여서 한 것으로 자신들의 행동과 자취를 말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 더욱이 이들 역적 무리는 머리를 감추고 그림자를 숨긴 채 궁중 안에서부터 농간을 부렸는데, 그 허다한 죄악은 하늘을 속이고 세상을 속일 수 있었지만 털끝만큼도 속일 수 없었던 사람은 오직 왕세손뿐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저들 무리가 왕세손에 대해 처음에는 자신들의 일을 방해한다고 미워하다가 중도에는 자신들의 간사함을 환히 알고 있다고 염려하였다.

이렇게 저들 무리가 왕세손과 각을 세우고 대립하는 형세가 이미 이루어지자 위태롭게 여겨 계략을 꾸미는 흔적이 점차 생겨났고 자신들의 세력을 보전하려는 모의가 더욱 깊어졌다. 이에 왕세손을 핍박하려는 계략이 점점 긴박해져서 마침내 목숨을 걸고 왕세손을 적(敵)으로 삼았으니, 이것은 진실로 일의 정세가 반드시 그렇게 된 것이다.” 『영조실록』51년(1775년) 11월30일

이러한 위급하고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천신만고 끝에 정조는 다음해(1776년) 3월10일 경희궁의 숭정문(崇正門)에서 즉위식을 치르고 왕위에 올랐다. 이때 그는 왕세손 시절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일컬어 ‘두렵고 불안하여 살고 싶은 마음이 없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그로부터 8개월이 조금 지난 11월18일 정조는 측근인 공조참판 김종수를 소견하는 자리에서 그동안 깊숙이 감추고 있던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를 보여주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동궁 시절의 어려움과 두려움을 이렇게 토로했다.

『존현각일기』는 정조가 왕세손 시절 남몰래 기록해 비밀리에 간직하고 있던 일기 형식의 비망록(備忘錄)이다.

“공조참판 김종수를 불러 친히 깊숙이 감추고 있던 『존현각일기』를 꺼내 보여주셨다. 임금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예로부터 내척(內戚)과 외척(外戚)의 화변(禍變)과 흉악한 무리의 역모(逆謀)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겪었던 일은 지난 사첩(史牒)에서 찾아보아도 어찌 비교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이에 김종수가 울면서 말하기를 ‘신들은 오히려 흉악한 역모가 이와 같이 극도에 이르렀는지 몰랐습니다. 지금 엎드려 일기를 살펴보니 그들이 궁궐의 안과 밖에서 화란(禍亂)을 만들어내고 거짓을 과장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하지 못할 짓이 없었습니다. 당시의 일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이 떨리고 간담이 서늘해집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흉악한 무리가 함부로 의심과 두려움을 자아내어 혹은 유혹하거나 협박하고 혹은 위태롭게 핍박하기도 했다. 마침내 재앙의 기미가 점점 급박해지자 반드시 먼저 동궁의 관리들을 제거한 다음 나를 해치려고 모의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두려움이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다’고 하였다.

김종수가 말하기를 ‘분란(紛亂)의 발단이 외척에게서 일어났고 화란(禍亂)이 궁궐에서 선동되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모두 흉악한 역적 무리가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러는 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일기를 보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일의 전말(顚末)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손이 가는 대로 기록하고 실었기 때문에 말의 뜻이 많이 통하지 않는다. 대략 교정(校正)을 가해야 널리 퍼뜨려 보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정조실록』 즉위년(1776년) 11월18일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정적들은 왕세손을 모함하고 무고해 내쫓으려고 했고, 심지어는 동궁의 관리들을 매수하거나 제거한 다음 왕세손을 암살하려는 음모까지 꾸몄다.

그러한 정치적 핍박과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도 왕세손 정조는 ‘넓은 도량’을 뜻하는 ‘홍(弘)’자를 취해 자호로 삼았다.

아마도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홍(弘)’자보다는 ‘굳센 의지’를 뜻하는 ‘의(毅)’자를 취해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려 하지 않았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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