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시대의 글을 쓴 이만이 최고의 문장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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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시대의 글을 쓴 이만이 최고의 문장가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4.28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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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① 창신(創新)의 미학④
 

[한정주=역사평론가] 현종과 숙종 연간 이른바 ‘육창(六昌)’이라 불리면 문단을 주도했던 김창협·김창집·김창흡·김창업·김창연·김창립 등의 육형제 중 한 사람인 농암(聾巖) 김창협 또한 문장을 지을 때는 진부한 말을 쓰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에서 진부한 말이란 보통 사람들이 일상에서 상투적으로 쓰는 말, 모든 경서(經書)에서 이미 언급한 말, 옛사람들이 이미 썼던 표현 모두를 포함한다.

더욱이 김창협은 옛사람들의 구절과 문자를 그대로 가져다 쓴 글은 ‘아주 더럽고 저속한 것’이라고 거칠게 비난하기까지 했다.

“당나라의 명문장가 한유는 글을 지을 때 진부한 말을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때 진부한 말이란 보통 사람들이 일상에서 쓰는 상투적인 말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모든 경서와 옛사람들이 이미 언급한 말의 대부분이 이른바 ‘진부한 말’이다. 예를 들어 『좌전』, 『국어』와 반고의 『한서』, 사마천의 『사기』의 문장이 기이하고 뛰어나지만 단 한 가지라도 그대로 따라 쓴다면 모두 진부한 말일 뿐이다.

지금 한유의 문집에 실려 있는 수백 편의 글을 읽어 보아도 단 한 마디라도 옛사람들의 글귀를 그대로 사용한 곳을 찾을 수 없다. 가령 「평회서비」는 오로지 『상서(서경)』를 법도로 삼았지만 단 한 마디도 『상서』에 있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동진행장」은 『좌전』을 모방했지만 단 한 마디도 『좌전』에 있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또 「장중승전후서」는 사마천의 『사기』를 꼭 빼닮았지만 단 한 마디도 『사기』에 있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 참으로 뛰어난 식견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 명나라의 문장가 중 이우린과 같은 사람은 옛사람들이 사용한 구절과 문자만을 가져다가 엮어 글을 지었다. 이것은 매우 더럽고 저속한 짓이다.

명나라의 왕세정 역시 일찍이 이러한 병폐를 거론한 적이 있는데, 그의 글을 보면 또한 같은 병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지(碑誌)의 서사 글도 모두 사마천과 반고의 글귀를 그대로 사용해 각 편마다 중복된 구절이 등장한다. 이 때문에 보이는 글마다 대부분 진부하기 그지없다.

한유가 힘써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을 온 힘을 쏟아 지어 놓고 스스로 당나라와 송나라의 문장보다 뛰어나다고 하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김창협, 『농암잡지(農巖雜識)』, ‘외편(外篇)’

다시 홍길주는 훌륭한 작품을 남긴 옛사람이 지금 세상에 태어났다면 지금 세상의 글, 즉 금문(今文)으로 일류가 되었을 것이고, 반대로 지금 세상에서 문장으로 으뜸인 사람이 옛 세상에 태어났다면 반드시 문장의 전범이 될 만한 고문(古文)을 지었을 것이라고 한 다음, 옛것을 흉내 내어 거의 꼭 같은 것은 지극한 글이라고 할 수 없다거나 옛것을 모방하지 않고 자기 시대의 글을 썼던 이들만이 최고의 문장가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곧 참신하고 창의적인 글을 쓰려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서 나온 감정과 생각’ 그리고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을 글쓰기의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옛날 사람과 지금 사람이 지은 문장은 처지를 바꾸면 모두 같다. 내가 일찍이 지은 ‘삼한의열녀전서(三韓義烈女傳叙)’ 속에서 이에 대하여 논한 적이 있다. 문인들 가운데에는 왕왕 고문(古文)을 모방하는 것을 능사로 삼는 자가 있다. 내가 그러한 사람들에게 문득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서경(서경(書經))』의 요전(堯典)과 우공(禹貢)을 지은 사람이 오늘날 세상에 태어난다면 또한 지금 세상 속에서 제일가는 일류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 제일가는 일류가 하(夏)나라 때 태어났다면 역시 반드시 전모(典謨) 즉『서경』에 실린 글들을 능히 지었을 것이다. 어찌 반드시 지은 바가『서경』의 글과 아주 가깝고 닮은 다음에야 글을 잘 지었다고 하겠는가!’

대저 고문을 모방하여 아주 가깝거나 닮은 것은 곧 지극한 문장이 아니다. 송(宋)나라의 유원보는『예기(禮記)』를 모방하여 원본과 거의 분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구양수와 소동파의 문장은 모두 고문을 모방하지 않았다. 송나라 희풍(熙豊) 연간의 문장에 대해 평론하는 사람이 유원보를 제일가는 일류로 여기겠는가 아니면 구양수와 소동파를 제일가는 일류로 삼겠는가?

구양수와 소동파로 하여금 선진(先秦) 때에 태어나게 했다면 반드시 진짜『예기』를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원보는 반드시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홍길주, 『수여연필(睡餘演筆)』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이라는 개념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필자가 글을 쓰거나 얘기를 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글의 가치와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사람들이 문장의 전범이자 가치 기준이라고 주장하는 고문(古文) 역시 그 글을 쓴 그 순간에는 금문(今文)이었을 것이고 새롭고 창의적인 오늘날의 글, 즉 금문 역시 세월이 지나면 고문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쓴다는 것은 금문이지만 또한 고문을 쓰는 것이다.

고문과 금문의 경계가 이와 같다면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을 가장 잘 묘사하고 표현할 수 있는 지금 시대의 나는 금문을 쓰면서 또한 고문을 쓰는 셈이다. 지금 시대의 글인 금문을 잘하는 사람이 옛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 시대의 글 또한 잘 했겠지만 옛 시대의 글을 모방하거나 흉내 내는 것을 잘하는 사람은 오히려 옛 시대에 태어나더라도 그 시대의 글을 짓지 못할 것이라는 홍길주의 말은 그런 점에서 아주 의미심장하다.

모방하거나 흉내만 낼 줄 아는 사람은 지금 시대이든 혹은 옛 시대이든 자신의 글을 짓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가짜 글일 뿐 참된 글은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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