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릉(金陵) 남공철…정조 서거 후 은둔하고자 했던 청계산 기슭
상태바
금릉(金陵) 남공철…정조 서거 후 은둔하고자 했던 청계산 기슭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4.28 14: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 선비의 자호(字號) 소사전(79)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의 금릉 남공철 묘.

[한정주=역사평론가] 자(字)는 원평(元平). 초계문신과 규장각 각신(閣臣)으로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북학파의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와도 두터운 교분을 쌓았다.

노론 시파로 정조 사후 한때 노론 벽파 세력에게 밀려나 조정을 떠났지만 김조순 등과 함께 다시 권력을 장악하고 세도정치의 서막을 열었다.

정조가 서거하자 시골에 들어가 은둔의 삶을 살고자 했던 남공철이 선택한 땅은 광주(廣州: 지금은 성남) 청계산 아래 금릉(金陵)이라고 불린 곳이었다. 이 무렵 그가 자호(自號)로 삼았던 ‘금릉(金陵)’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은둔의 삶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이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며 노론 벽파 정권을 이끌던 정순왕후가 1805년 사망했기 때문이다.

다시 조정에 복귀한 후 남공철은 승승가도를 달렸다. 특히 1817년(순조 17년) 우의정에 오른 다음 14년 동안이나 재상의 자리에 있었고, 나이 74세가 되는 1833년에 영의정으로 치사(致仕)해 봉조하(奉朝賀)가 되는 최고의 호사를 누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