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弘齋) 정조 이산⑥…“달빛이 비추는 개울은 만(萬)개지만 밝은 달은 하나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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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弘齋) 정조 이산⑥…“달빛이 비추는 개울은 만(萬)개지만 밝은 달은 하나일 뿐”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5.11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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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㉜
▲ 정조대왕 능행도 중 노량주교도섭도(鷺梁舟僑渡涉圖). 한강진나루와 노량진나루를 연결하는 배다리를 통해 정조대왕의 행차가 한강을 건너고 있다.

[한정주=역사평론가] 정조는 사망하기 2년 전인 1798년 다시 새로운 호를 지었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무척 길고도 독특한 호였다. 그리고 수상록(隨想錄)인 『일득록』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내가 춘저(春邸: 동궁)에 있을 때 연침에다가 ‘홍재’라고 편액을 걸었다. 이것은 대개 ‘군자는 도량이 넓고 마음이 굳세야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리고 10여 년 전에 문 위 가로 댄 나무에다가 탕탕평평실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또 근래에 와서는 벽에 만천명월주인(萬千明月主人)이라고 적어 놓았다. 바라건대 여러 신하들이 그 속에 담긴 나의 은미(隱微)한 뜻을 알았으면 한다.” 『일득록』, ‘훈어(訓語)’

여기에서 정조가 말한 ‘그 속에 담긴 은미한 뜻’이란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만 개의 개울을 비추듯이 자신의 다스림이 일부 특권 계층이 아닌 만백성에게 두루 혜택이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특히 다른 호와는 달리 정조는 ‘만천명월주인옹’에 담은 자신의 간절한 뜻과 의지를 조정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알 수 있도록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글까지 지어 발표했다.

“만천명월주인옹(萬千明月主人翁)은 말한다. … 달은 하나이고 물의 종류는 만 개나 된다. 그렇지만 물이 달빛을 받을 때 앞개울도 달이고 뒷개울도 달이다. 그래서 달과 개울의 수가 동일하게 된다. 개울이 만 개면 달 역시 만 개가 되는 것이다. 물론 하늘에 있는 달은 진실로 하나일 뿐이다.

… 나는 수많은 사람을 겪어 보았다. 아침에 들어왔다가 저녁에 나가고, 무리지어 다니며 재빠르게 움직이며 오는 듯한 자도 있고 가는 듯한 자도 있었다. 형상이 안색과 다르고, 눈이 마음과 다르고, 통하는 자와 막힌 자, 강인한 자와 유약한 자, 멍청한 자와 어리석은 자, 소견이 좁은 자와 천박한 자, 용감한 자와 겁이 많은 자, 현명한 자와 교활한 자, 미친 자와 성급한 자, 모난 자와 원만한 자, 탁 트여 통달한 자와 무게가 있는 자, 함부로 말하지 않는 자와 말을 꾸며서 잘하는 자, 험악하고 드센 자, 멀리 바깥에 있는 자, 명예를 좋아하는 자, 실질에 힘쓰는 자 등 그 유형을 따로 구분한다면 백 가지 천 가지가 될 것이다.

처음 내가 그들을 내 마음으로 미루어 보고, 나의 뜻으로 믿어 보고, 재주와 역량을 시험해 돌아보고, 화로 속에서 주조하듯 단련시키고, 일어나도록 북돋아주고, 일을 만들도록 진작시키고, 바로 잡으려고 규제하고, 어긋난 것은 교정하여서 도와주고 곧게 한 것이 마치 맹주(盟主)가 규장(奎章)으로 제후들을 모아 다스리는 듯 했다. 그 응대하고 수작하고 오르고 내려가는 과정에 피로함을 느낀 지 어언 20여 년이나 되었다.

근래에 다행하게도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의 이치를 깨우치고 또한 사람은 각자 그 생김새에 따라 다루어야 한다는 기술을 얻게 되었다. 대들보와 기둥은 그 용도에 맞춰 준비하고, 오리와 학은 그 태생에 따라 살게 하여 각각 사물의 이치에 맞게 대응하고 이치에 맞춰 순응(順應)하였다.

단 그 가운데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하며, 그 선한 것은 드러내고 그 악한 것은 숨겨주고, 그 좋은 것은 안정시키고 그 잘못한 것은 제압하고, 그 큰 것은 나아가게 하고 그 작은 것은 포용하였다. 그 뜻을 오히려 높게 사고 그 재주를 뒷전으로 미루어 양 극단을 잡고서 중도(中道)를 취하였다.

… 그런 다음에 두루 통달한 자를 대하면 규모가 크고 주밀하게 살피고, 꽉 막힌 자를 대하면 여유를 가지고 너그럽게 행동하고, 강한 자를 대하면 부드럽게 하고, 유약한 자를 대하면 강하게 하고, 멍청한 자를 대하면 환히 밝게 하고, 어리석은 자를 대하면 두루 슬기롭게 하고, 협소한 자를 대하면 넓게 하고, 천박한 자를 대하면 깊게 하였다.

… 모가 난 자는 수레바퀴처럼 둥글게 대하고, 원만한 자는 규각(圭角)처럼 모나게 대하고, 통달하여 탁 트인 자에게는 나의 깊은 뜻을 보여주고, 말과 행동에 무게가 있는 자에게는 나의 온화한 마음을 보여준다. 말을 아끼는 자에게는 민첩하게 행동하도록 경계하고, 말을 꾸며서 하는 자에게는 물러나 드러내지 않도록 누그러뜨리고, 험악하고 드센 자는 산과 못처럼 포용하고, 멀리 바깥에 있는 자에게는 옷자락과 장막처럼 감싸주고, 명예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실질에 힘쓰도록 권유하고, 실질에 힘쓰는 자에게는 두루 지식에 통달하도록 권한다.

… 태극에서부터 미루어 가다 보면 그것이 각각 나뉘어서 만물(萬物)이 된다. 그 만물에서부터 궁구해 오다 보면 다시 되돌아와 하나의 이치(一理)로 귀결된다.

… 내가 원하는 것은 성인을 배우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달은 수없이 많은 물속에 있어도 하늘에 있는 달은 참으로 밝다. 그 달이 아래를 환하게 비치면 물은 그 빛을 얻게 된다.

용문(龍門)의 물은 넓고 빠르고, 안탕(雁宕)의 물은 맑아 잔물결이 일고, 염계(濂溪)의 물은 푸르다 못해 검푸르고, 무이(武夷)의 물은 거세게 흘러 소리가 나고, 양자강(揚子江)의 물은 차갑고, 탕천(湯泉)의 물은 따뜻하다. 강물은 담담하고 바닷물은 짜다. 경수(涇水)는 흐리고 위수(渭水)는 맑다. 이렇듯 물은 제각각이지만 달은 각기 그 형태에 따라 비춰준다.

물이 흐르면 달도 함께 흐르고, 물이 머무르면 달도 함께 머무른다. 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달도 함께 거슬러 올라가고, 물이 돌아 흐르면 달도 함께 돌아 흐른다. 그러나 그 물의 큰 근본은 모두 달의 정기(精氣)이다.

나는 물이 세상 사람들이라면 달이 비춰서 그 상태를 드러내는 것은 사람들의 형상이고, 달은 태극이며 그 태극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이 만 개의 개울을 밝게 비춘 달에 태극의 신비로운 작용을 비유하여 말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또한 그 달빛이 반드시 비춰 포용하는 것을 만약 태극의 테두리로 헤아리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물속에 뛰어들어 달을 잡아보려고 수고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아무 소용이 없는 짓임도 알고 있다. 이에 마침내 내가 한가롭게 거처하는 곳에 ‘만천명월주인옹(萬千明月主人翁)’이라고 적어 자호(自號)로 삼았다. 때는 무오년(戊午年: 1798년) 2월3일이다.” 『홍재전서』, ‘만천명월주인옹자서’

모든 학문에 통달한 대학자답게 철학적 어법을 빌어 ‘달(月)’과 ‘개울(川)’에 비유해 백성과 자신의 관계를 설명하고 국정과 세상의 운영 원리를 해석한 뛰어난 작호기(作號記)다. ‘군사(君師)’라는 호칭에 걸맞는 정조의 당당한 기상과 고고한 기품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글이다.

앞서 소개한 대로 ‘탕탕평평실’이 붕당과 적서 차별 등 양반 지배계층의 폐단과 문제를 시정하고 개혁하겠다는 뜻과 철학을 담고 있다면 필자가 보기에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호에는 노비와 같은 최하층민이나 가난하고 힘없는 소상인 등 피지배 계층이 겪고 있는 고통과 어려움까지 해결하겠다는 정조의 뜻과 의지가 담겨져 있다.

하나의 달이 만 개의 개울을 비추는 것처럼 한 사람의 제왕으로서 만백성에게 두루 은택(恩澤)을 베풀겠다는 정조의 뜻과 의지가 반영된 대표적인 개혁정책은 다름 아닌 ‘노비제도의 혁파’와 ‘신해통공(辛亥通共)’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사회에서 노비는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사고는 임금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임금이 은택을 베풀어야 할 ‘민(民)’ 즉 ‘백성’의 범주에 노비는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비를 하나의 재산으로 보았기 때문에 후손에게 토지와 재물을 상속하듯 노비 또한 물려주었다. 더욱이 노비는 하나의 상품처럼 매매되기도 했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실제 -노예는 제외하고- 시민권을 가진 ‘남자’에게만 적용되는 제한된 민주주의였던 것처럼 유학에서 정치의 대의명분으로 주창한 ‘민본(民本)’에 노비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런데 정조는 노비 역시 자신의 신민(臣民)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찌 귀한 자가 있고 천한 자가 있겠느냐?”고 역설했다. 정조의 이러한 사고는 유학의 ‘민본주의’ 사상 보다 한발 더 나아간 근대적 개념의 ‘인본주의’ 사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신해통공’은 시전 상인들의 독점적 상업 특권과 횡포 때문에 큰 피해를 입고 있던 소상인, 행상(行商) 그리고 노점상 등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해주는 경제조치였다. 통공정책은 정조 개혁의 선봉장이나 다름없는 채제공이 주도했는데, 당시 그가 이 정책에 크게 반발해 ‘통공 정책을 폐지하라’고 시위를 한 시전 상인들에게 한 말은 정조의 ‘인본주의’ 철학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고 있다.

“도성 안에서 사는 사람과 도성 주변에서 사는 사람은 모두 똑같이 나라의 백성이다. 행상이든 점포를 갖고 있는 상인이든, 또 물품이 많든 적든 장사를 하는 행위는 모두 떳떳하다. 그런데 시전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 자기 물건을 가지고 장사하는 사람을 단속하고 내쫓아 도성 안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만드는 일은 참으로 사람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다. 이 사람도 백성이고 저 사람도 백성인데, 어찌 차별을 둘 수 있겠는가!” 『정조실록』, 정조 17년(1793년) 3월10일

양반이나 특권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보호해주는 임금이 아니라 일반 백성 심지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노비에게까지 은택을 베푸는 제왕이 되겠다는 뜻과 철학은 정조 재위 24년 동안 여러 가지 개혁정책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정조의 개혁정책은 노론 벽파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의 끊임없는 저항과 반발에 부딪쳤다. 그래서 개혁은 부분적인 성과를 내는데 그치거나 혹은 유명무실해지기 일쑤였고 심지어 좌초당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까닭에 정조는 즉위 이후 자신이 추진해온 개혁정책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강력한 뜻과 의지를 담아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호를 지었을 것이다. 만백성의 주인이자 보호자로서 그들에게 혜택이 미치는 일이라면 결코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반발에 양보하거나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의 선언이었다.

이렇듯 정조가 말년(1798)에 자호로 삼은 ‘만천명월주인옹’의 뜻을 보더라도, 그의 개혁정치가 누구를 위한 일이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정조의 개혁정치가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의 여부를 떠나 그 속에 담겨있는 ‘인본주의’ 철학만은 결코 평가절하 되어서는 안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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