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은 논리와 주장의 근거로만 활용한다”
상태바
“옛글은 논리와 주장의 근거로만 활용한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5.12 08: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① 창신(創新)의 미학⑥
 

[한정주=역사평론가] 참신하고 창의적인 글쓰기는 이처럼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거나 창조하기도 한다. 이것은 창신의 미학이 글쓰기 철학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참신하고 창의적인 글쓰기가 이토록 중요하고 가치가 있음에도 왜 사람들은 옛사람의 글을 모방하고 답습하거나 심지어 표절하는 것일까?

홍석주의 또 다른 동생인 홍길주는 옛글을 ‘모방하거나 표절하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아주 흥미롭게 분석해 놓았다.

홍석주와 홍길주 그리고 홍현주 세 사람의 집안인 풍산 홍씨는 경화거족(京華巨族)으로 19세기 초‧중반 문장학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던 가문이다. 특히 이들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세도정치가 정치·경제·지식·문화계를 지배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오직 새롭고 독창적인 문장의 길을 추구했다(앞서 소개했던 홍석주의 문장론을 볼 수 있었던 ‘홍석주가 동생 헌중에게 답한 글’ 속의 헌중(憲仲)이 다름 아닌 홍길주이다. 홍길주의 자(字)가 헌중이다).

어쨌든 홍길주는 대개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글과 책이 후세에까지 널리 퍼져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기를 기대하는데, 이 때문에 옛글의 권위와 영향력에 기대어 그 핵심과 요점을 취해 다시 모방하거나 표절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요행수로 옛글이 사라져 전해지지 못하고 자신의 글은 살아남아 전해질 경우 옛글을 지은 옛사람은 잊혀지고 그의 글을 모방하거나 표절한 자신은 큰 명성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글은 설령 후세 사람들에게 널리 읽힌다고 해도 옛사람의 글만큼은 될 수 없다. 옛글을 모방하거나 훔쳐 쓴 글이라면 구태여 옛글을 읽지 그 글을 읽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글을 짓거나 책을 써서 논리와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은 대체로 자신의 글과 책이 후세에 널리 퍼져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될 것을 기대한다. 그러고는 이미 앞선 시대의 사람들이 지어 놓은 기록에서 핵심과 요점을 가려 뽑아 다시 사용하곤 한다.

왜 이러한 행동을 하는가? 자신보다 앞선 시대 사람들의 기록은 없어질 가능성이 큰 반면 자신의 글과 책은 반드시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몇 세대가 지난 후 모두 잿더미로 사라지거나 혹시 살아남아 책 더미 속에 나란히 파묻혀 좀이 쓸어 있다가 어떤 것은 드러나고 어떤 것은 사라질지 누가 알겠는가? 나는 『수여방필(睡餘放筆)』, 『수여연필(睡餘演筆)』, 『수여난필속(睡餘瀾筆續)』의 여러 편 글을 지으면서 옛사람들이 남긴 글과 책을 표절해 사용하는 것을 가장 큰 금기로 여겼다. 이것은 내 글과 책이 후세 사람들 사이에서 돌려 읽힌다고 해도 옛사람들만큼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러 옛사람의 글과 책에서 끌어다 쓴 것도 있지만, 그것 역시 내 논리와 주장의 근거로 삼기 위해서였을 뿐 결코 그 전체 내용을 훔쳐 사용하지 않았다. 훗날 사람들이 이 책을 본다면, 마땅히 내가 세운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홍길주,『수여난필속(睡餘瀾筆續)』

따라서 만약 옛사람의 글과 책에서 어떤 것을 끌어다 쓴다면 자신의 논리와 주장의 근거로 삼기 위해서일 뿐 결코 그 전체나 일부 내용, 핵심과 요점 혹은 자구(字句)나 문장을 훔쳐 사용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글 속의 감정과 생각, 논리와 주장은 반드시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참신하고 창의적인 것이어야 하고, 옛글은 그것의 근거로만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문을 모방하거나 답습하지 않고 참신하며 창의적인 글을 쓰려고 한 조선 지식인들의 문학적 실험과 과감한 시도는 문장의 내용은 물론 문장의 형식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났다. 고문의 문체와 형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쓴 대표적인 글 역시 이덕무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덕무는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문장의 형식에서도 진부하거나 상투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창의적인 시도와 실험을 주저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적언찬(適言讚)’이라는 글에서는 ‘찬지일식진(讚之一植眞), 찬지이관명(讚之二觀命), 찬지삼병효(讚之三病殽), 찬지사둔훼(讚之四遯毁), 찬지오이령(讚之五怡靈), 찬지육누진(讚之六耨陳)), 찬지칠간유(讚之七簡遊), 찬지팔희환(讚之八戱寰))’과 같이 번호를 붙이고 소제목을 정하는 방식으로 글을 썼는데, 이러한 문장의 형식은 이전 시대는 물론 동시대의 문장가에게서 조차도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글쓰기 방법이었다.

굳이 찾는다면 허균의 문집에 수록된 『한정록(閑情錄)』에서 소개하고 있는 원굉도의 ‘병화사(甁花史)’와 ‘상정(觴政)’, 오영야(吳寧野)의 ‘서헌(書憲)’ 등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원굉도는 명나라 말기 고문을 배격하고 새로운 글쓰기를 주창한 공안파(公安派)의 대표 문인이고 오영야 또한 중국 사람이기 때문에 엄격하게 말하자면 이덕무 이전에 활동한 조선의 문인 중 이러한 형식의 글을 쓴 사람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허균 역시 새로운 형식과 문체의 글쓰기를 단지 소개하는 데 그쳤을 뿐 직접 실험적인 형식의 글을 쓰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매화를 끔찍이 좋아해 스스로 ‘매탕(槑宕: 매화에 미친 바보)’이라는 호(號)를 사용했던 이덕무는 1년 내내 매화의 풍모와 아취를 즐기려고 직접 밀랍으로 인조 매화를 만드는 방법을 창안했고 마침내 인조 매화 제조에 성공한 다음 이 윤회매를 편리하고 쉽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엮어서 ‘윤회매십전(輪回梅十箋)’이라는 글을 저술했다.

이 ‘윤회매십전’에서도 이덕무는 ‘일지원(一之原: 원), 이지판(二之瓣: 꽃잎), 삼지악(三之萼: 꽃받침), 사지예(四之蘂: 꽃술), 오지화(五之花: 꽃), 육지조(六之條: 가지), 칠지식(七之植: 꽃꽂이), 팔지첩(八之帖: 첩), 구지권(九之券: 권), 십지사(十之事: 사)’처럼 번호를 붙이고 순서를 정하는 방식으로 글을 써 새로운 문체를 향한 과감한 실험을 다양한 글을 통해 시도했다.

여기에서는 읽어 내려가기 쉬운 ‘적언찬’을 소개한다. ‘윤회매십전’은 인조 매화를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여기에 옮겨 적기 어려운- 그림이 삽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언(適言)’이란 ‘꼭 들어맞는 말’을 뜻하므로 ‘적언찬(適言讚)’이란 ‘자신에게 꼭 들어맞는 말을 예찬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실제 이 글에서 이덕무는 자신에게 꼭 들어맞는 말 여덟 가지를 지어서 젊은 시절 자신의 삶을 스스로 예찬하고 있다.

“만물(萬物)은 참됨을 통해 이루어지고, 만사(萬事)는 참됨을 통해 행해진다. 그러므로 진짜를 심는 것을 가장 먼저 해야 한다. 이미 진짜를 심은 뒤에 운명을 관찰하지 않으면 꽉 막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는 운명을 관찰해야 한다.

이미 운명을 관찰한 다음에는 잡다한 것에 현혹되는 것을 병(病)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방탕에 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는 마음을 다스려 잡다한 것에 미혹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미 잡다한 것에 미혹되는 것을 경계한 뒤에 다른 사람의 헐뜯음으로부터 도피하지 않으면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헐뜯음으로부터 멀리 도피하는 것을 그 다음에 두었다. 헐뜯음으로부터 멀리 도피했는데도 영혼이 즐겁지 않으면 온 몸이 삐쩍 마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에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 영혼이 즐거운 것을 그 다음에 두었다. 영혼이 이미 즐겁다고 해도 진부함을 덜어내어 없애지 않는다면 고루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으로 진부함을 덜어내어 없애야 한다. 진부함을 덜어내어 없앤다고 해도 교유하는 벗을 잘 가리지 않는다면 어지러워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는 교유하는 벗을 잘 가려야 한다. 기운이 우주에 모여 있기에 만물도 있고 만사도 있어서 흡사 유희(遊戱)와 같은 것이 있다. 그런 까닭에 우주 안의 유희로 글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총괄하여 ‘적언(適言)’이라고 이름 붙였으니 삼소자(三踈子) 윤가기에게 지어준 글이다. ‘적(適)’이라는 것은 즐거움이며 편안함이다. 나의 삶을 즐기고 나의 본분을 편안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또한 적언(適言)이란 적연(適然)이다. 적연이라는 말은 ‘억지로 힘써 하는 것이 아니다’는 뜻이다. 삼소자 윤가기는 몸가짐을 유지하는 것이 온화하고 순종적이고, 마음가짐을 다스리는 것이 진실로 세밀하다. 대체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자신을 지키고 크고 넓게 노니는 사람이다. 내가 그의 사람됨을 아름답게 여겨서 여덟 단계의 예찬을 지었다.

예찬 1. 식진(植眞 : 진짜를 심다)

석록(石綠)으로 눈동자를 새겨 넣고 유금(乳金)으로 날개를 물들인 나비가 붉은 꽃받침에 앉아 펄럭펄럭 긴 수염을 나부끼고 있다. 영악한 날개깃을 드러나지 않게 엿보며 총명한 어린아이가 오랫동안 도모하다가 갑자기 때리고 문득 낚아챘지만 살아 있는 나비가 아니요 저 그림속의 나비였도다. 아무리 진짜에 가깝고 몹시 닮아 거의 같다고 해도 모두 제이(第二)의 위치에 자리할 뿐이네. 또한 진짜에 가깝고 몹시 닮아 거의 같은 것이 어디에서 기원(起源)하는지 살펴보라! 본바탕을 먼저 엿보아야 가짜로 인해 구속당하지 않으니 만 가지 종류의 온갖 사물은 이 나비의 비유를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예찬 2. 관명(觀命 : 운명을 관찰하다)

이름은 현부(玄夫)라고 부르고 자(字)는 조화옹(造化翁)이라 일컫는 분이 거대한 양조(釀造) 기관을 주관하여 하늘을 항아리 속으로 삼았다. 기운을 체로 쳐서 시고 삼삼하고 진하고 묽은 술이 잠기고 스며들어 각각 운명을 부여하였으니 그 심오한 공력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 진하다고 은혜라고 할 수 없고 묽다고 어찌 상심하겠는가? 몰래 미리 운명을 엿보면 조급해지고 교묘하게 도피하면 흉사(凶事)를 겪게 된다. 오늘은 오늘이고, 어제는 어제이고, 봄은 봄이고, 겨울은 겨울이다. 이와 같이 하고 이렇게 하여 처음처럼 끝을 마무리한다.

예찬 3. 병효(病殽 : 미혹을 경계하다)

사람이 가진 커다란 근심은 혼돈이 뚫린 때부터 꾸미거나 다듬는 것은 넘쳐서 드러나는 반면 진실하고 순박한 것은 깎아내고 가두어버렸다. 색상과 재물을 탐하고 눈짓으로 말하며 이마로 깜짝이고 혀를 살찌우며 달콤하게 빚어내어 뱃속과는 반대되는 말로 칼날을 감추고 있다. 손님 앞에서는 인사하고 뒤에서는 혹평하며, 벗을 끌어들여 면전에서 거짓말을 한다. 뛰어난 기상은 환난(患難)을 품고 있고 빼어난 재주는 횡액(橫厄)을 매개한다. 선비가 장사꾼의 돈꿰미에 미혹되고, 사내대장부가 부녀자의 머리꾸미개를 감내한다. 어찌하여 품성의 배양을 멀리하는가? 아! 복록을 해칠까 두렵구나.

예찬 4. 둔훼(遯毁 : 헐뜯음으로부터 도피하다)

재주는 명성을 부르지 않지만 명성은 반드시 재주를 따른다. 재앙은 재주에 기대지 않지만 재주는 반드시 재앙을 잉태한다. 재앙을 어찌 스스로 빚어내겠는가? 사실은 헐뜯음이 빚어내는 것이다. 훌륭한 거문고는 쉽게 망가지고, 뛰어난 말은 다른 말보다 먼저 쇠약해지고, 기이한 서책은 좀 벌레가 망가뜨리고, 아름다운 나무는 딱따구리가 꺾어 넘어뜨린다. 화려한 재주를 자랑하니 해코지를 재촉하고 소리를 막으니 어리석음에 가깝다. 즉시 나아가지도 말고 물러서지도 말라. 복된 대지가 별도로 열릴 것이다. 자연의 바탕을 지키고 무고한 시기(猜忌)를 떨쳐버려야 할 것이다.

예찬 5. 이령(怡靈 : 영혼을 즐겁게 하다)

물고기는 지혜롭고 새는 영험하다. 바위는 빼어나고 나무는 어여쁘다. 자연의 풍경과 더불어 정신은 즐겁고, 감정은 정경을 따라 옮아간다. 법이 어찌 옛것을 답습하랴? 양식은 속된 것에 끌려 다니지 않고, 별도로 오묘함과 빼어남을 갖추어 통쾌하게 장애와 얽매임에서 벗어난다. 대지를 흐르는 가을철 물과 하늘에 떠 있는 봄철 구름과 같이 마음의 지혜가 샘솟는 구멍과 눈동자는 영롱하기 끝이 없다. 술은 술잔을 재촉하지 않고, 거문고는 현(絃)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다. 손으로 턱을 바치고 낭랑하게 읊조리면 앓고 있던 병이 말끔히 사라진다.

예찬 6. 누진(耨陳 : 진부함을 제거하다)

표범은 이미 말을 생산하고, 말은 또한 사람을 생산하는 것처럼 변화의 기미는 거리낌이 없고 혁신의 과정은 항상 새롭다. 구애받는 선비는 협소한 견문으로 옛사람이 내뱉은 말만 진귀하게 여겨 추종한다. 하나의 법식(法式)을 뛰어넘지 못하고 항상 몇 세대 뒤떨어져 있다. 절름발이의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를 따라하면 절뚝거리게 되고 서시(西施)를 흉내 내 찡그리다보면 주름살만 잡히게 된다. 석학(碩學)은 활달하여 속된 것을 벗어난 높은 식견으로 낡고 썩은 것을 내던지고 진부한 것을 씻어낸다. 말의 겉모습만 보지 않아 기린(騏驎 : 천리마)을 잃지 않은 것처럼 옛것을 저울질하고 지금 것을 측량하는 눈동자가 진귀하고도 진실하다.

예찬 7. 간유(簡遊 : 교유하는 벗을 선택하다)

앞선 시대의 사람은 보지 못하고 후대의 현인(賢人)은 뒤따라가 붙잡지 못한다. 아득하게 거리를 두느라 무리와 어울리지 못하면 나의 충정(衷情)을 누구에게 열어 보이나? 거대한 인연을 맺어서 이 세상에 나란히 태어난 벗과 온화하게 수염과 눈썹을 맞대고서 심폐(心肺)를 활짝 내비친다. 방을 함께 쓰지 않는 아내이고, 피를 함께 나누지 않은 형제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백안시(白眼視)하지 않고 죽은 다음에는 뜨거운 눈물 참아낸다. 학문은 길러주고 재주는 칭찬하며 잘못은 경계하고 가난은 구제한다. 그러나 기생충 같은 무리는 시기심을 뱃속 가득 채우고 등 뒤에서 헐뜯는 짓이나 할 뿐이다.

예찬 8. 희환(戱寰 : 우주 안에서 유희하다)

내 앞에는 내가 없고 내 뒤에도 내가 없다. 이미 무(無)에서 왔건만 다시 무(無)로 되돌아간다. 많지 않은 소수(少數)이니 얽매임도 없고 구속받을 것도 없다. 얼마 전까지 젖 먹던 내가 갑자기 수염이 나고 잠깐 사이에 늙더니 또한 문득 죽음에 이른다. 마치 거대한 바둑판에서 효로(梟盧)를 핍박하거나 침범하는 듯, 거대한 놀이마당에서 물고기 가죽을 입은 사내처럼 조급하지도 않고 허둥지둥하지도 않으며 하늘을 좇아 즐거워한다.”  이덕무,『병세집(幷世集)』, ‘적언찬병서(適言讚幷序)’ (안대회 지음,『고전산문산책』, 휴머니스트, 2008. p680〜681 참조)

이후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16세기 허균에게서 그 싹을 발견할 수 있고 18〜19세기에 들어와 폭발적으로 유행한 소품문(小品文) 역시 고문의 형식과 전범 및 규범을 거부하고 자유분방하고 파격적인 형식의 새로운 산문 미학을 추구했다.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