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의 원조는 세종이다”…『뇌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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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의 원조는 세종이다”…『뇌물의 역사』
  • 심양우 기자
  • 승인 2015.07.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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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물 스캔들로 사악을 받고 최후를 맞은 우암 송시열(왼쪽)과 백호 윤휴.

주자학의 수호신으로 송자(宋子)로 일컬어졌던 우암 송시열과 그의 최대 라이벌 백호 윤휴는 뇌물 스캔들로 사약을 받아 최후를 맞이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1675년 사헌부 장령 남천한과 사간원 정언 이수경이 공동으로 올린 상소가 두 사람의 뇌물 스캔들에 불을 당겼다.

상소문에 따르면 송시열은 오직 붕당을 만드는 일에만 힘을 써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하는 자는 사사로운 원수를 공격하듯 하니 인사는 모두 그의 명령을 따르고 언관의 탄핵은 죄다 그의 지휘를 받았다. 뇌물이 낭자하고 청탁이 횡행하며 재판의 판결도 인간관계로 결정됐다.

또한 자기 무리를 데리고 지방을 돌아다녀 민가에 있는 닭과 개마저도 힘들었다는 다른 기록도 있다. 송시열이 나타날 때마다 접대하고 상납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선 송시열의 서인은 윤휴를 표적으로 뇌물을 받아 재산을 늘렸다고 공격했다. 서인들은 윤휴가 관사의 물건을 제멋대로 가져다 썼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굴곡 많은 정치역정은 경쟁하듯 뇌물 스캔들을 불러왔고 결과는 비극적이었다. 조선 정치사에서 누군가를 숙청할 때 뇌물만큼 좋은 소재는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거의 모든 관료는 선물 같은 상납, 상납 같은 선물을 받고 뇌물죄로 쫓겨나거나 비방을 받았다. 이는 조선의 정치판을 더욱 당파적이고 감정적인 싸움으로 몰고 가는 데 크게 기여했다.

뇌물죄로 엮을라치면 누구라도 걸려 쫓겨날 수 있었고, 쫓겨난 사람은 모두가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다. 승자는 쫓겨난 자의 이권을 접수하고 이권을 빼앗긴 사람은 다시 뇌몰죄로 그들을 공격했다.

끊임없는 이권 쟁탈전과 뇌물죄를 이용한 몰락과 숙청, 이는 뇌물이 만든 정치의 메커니즘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뇌물 관련 사건은 3000여건에 달한다. 하지만 고위관료들이 받는 뇌물 비리에 대해서는 그 처벌이 관대했다.

1424년 세종은 폭탄선언을 했다. 뇌물과 관련해 받은 사람과 준 사람 모두를 처벌하겠다는 ‘양자처벌법’을 선포한 것이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김영란법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신간 『뇌물의 역사』(이야기가있는집)는 동서양과 고대에서 현대까지의 역사를 통해 뇌물의 실체를 파헤친다. 왜 뇌물은 사라지지 않는지, 뇌물이 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됐는지를 구체적 사례를 들며 이야기한다.

뇌물의 영어 표기는 ‘bribe(브라이브)’다. 이는 자선이나 자비심을 베풀 때 쓰는 선의의 물건을 일컫는다. 중세 시대에는 ‘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우리나라에서는 ‘떡값’이라는 명목으로 소소하게 건네지는 돈이다. 영국에서는 ‘집에 가다가 모자나 사서 쓰라’며 공무원들에게 푼돈을 쥐어주던 관습에서 ‘해트(hat)’라 표현하기도 했다.

뇌물이라고 하면 거대한 돈이 오고갈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1960년대 한 공무원은 기업체를 방문했을 때 얻어먹은 냉면 한 그릇에 부패 공무원으로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가장 쩨쩨한 뇌물 사건으로 기록되기는 했지만 이처럼 뇌물과 선물의 경계는 모호하다.

우리나라 ‘공무원 행동강령’에서는 뇌물과 선물을 돈의 액수로 규정하고 있지만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의도된 대가를 노리느냐,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이 뇌물과 선물의 차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항상 선물을 가장한 뇌물이 야기한다.

이렇듯 뇌물은 소소하지만 거대하게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야기하고 200년간 전쟁을 지속한 십자군원정은 한 번의 뇌물로 극적인 반전을 이루게 된다.

 

1차 원정 때 십자군은 난공불락의 안티오크를 만나게 된다. 이 성을 넘어야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식량도 떨어져가고 있었고 전염병까지 돌아 많은 군사들이 죽었다. 또 투르크의 군대도 거의 당도하고 있었다.

그때 십자군 원정대의 대장이었던 보에몽은 성의 한 구역을 지키고 있던 수비대장을 매수해 성문을 열게 했고, 십자군은 결국 안티오크를 점령하여 예루살렘 공국을 세울 수 있었다.

저자들은 “뇌물을 수치로 규정하거나 정의하고 판단할 수 있는 완벽한 개념을 마련하려는 노력은 역사적으로 볼 때 모두 실패했다”면서도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인류사회는 유지됐고 발전하는 집단과 부패하는 집단으로 나뉘게 됐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뇌물을 근절하는 완벽한 방법을 찾기보다 끊임없는 다스림과 싸움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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