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 양반 사대부 출신 상인…“선진적 상업·경영 방식 도입”

[조선의 경제학자들] 사대부 출신 대상인(大商人)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①

2016-09-21     한정주 기자

[조선의 경제학자들] 사대부출신 대상인(大商人)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①

[한정주=역사평론가] 유수원과 박제가의 ‘양반 상인론’에 대해 앞서 자세하게 소개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실제 양반 사대부 출신이면서 상업 활동에 나선 상인이 있었을까?

16세기 조선의 문헌과 기록을 뒤지다 보면 훗날 박제가와 유수원이 ‘양반 상인론’의 실제 모델로 삼았을 법한 인물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다름 아닌 『토정비결』의 저자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이다.

이지함이 탁월한 상업 수완으로 막대한 재물을 모은 대상인이었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이지함이 몸소 상인이 되어 막대한 재물을 축적했고 또한 백성들에게 생업(生業)을 가르쳤다고 전하고 있다. 유몽인은 이지함이 사망할 때 이미 20세의 나이였고, 또한 이지함의 집안인 한산 이씨와도 매우 절친한 관계였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당시의 상황을 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다.

“(이지함은) 손수 상인이 되어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맨손으로 생업에 힘써 몇 년 안에 수만 석에 이르는 곡식을 쌓았다. 그러나 모두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준 다음 소매를 펄럭이며 떠나가 버렸다. 바다 가운데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었는데, 그 열매가 수만 개나 되었다. 그것을 갈라서 바가지를 만들어서 곡식을 사들였는데 거의 1000석에 이르렀다. 이 곡식을 한강변의 마포로 운송했다.” 유몽인, 『어우야담』

특히 이지함은 육지는 물론 바다와 강을 자유롭게 이용한 상업 활동을 펼쳤는데, 이것은 해상·수상 교통로가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아주 선진적이고 획기적인 상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지함의 주요 활동 무대는 해안가인 충남 보령과 강변인 서울의 마포로 알려져 있다. 마포는 당시에도 물산의 집산지로 상업과 경제 활동의 중심지였다.

이렇듯 이지함이 평생 거처로 삼았던 지역이 뱃길을 활용하기 쉬운 상품 유통의 중심지였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해로(海路)와 수로(水路)를 이용한 상업 활동을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

이지함이 사망한 후 200여 년이 지난 1778년 『북학의』을 저술한 박제가는 당시(18세기) 조선이 수레를 이용하는 이로움을 포기하고 배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오로지 이지함만은 상선(商船)을 이용할 줄 알았다고 했다.

“토정 이지함 선생이 일찍이 외국의 상선 여러 척과 통상하여 전라도의 가난을 구제하고자 한 적이 있다. 그 분의 식견은 탁월하면서도 원대했다고 하겠다. 『시경』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내 옛 사람을 그리워하네. 진실로 내 마음을 알고 있으니.’” 박제가, 『북학의』 ‘강남 절강 상선과 통상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

뱃길을 자유자재로 이용한 이지함의 상술은 당대 사람들의 시각에서 볼 때 매우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전설과 설화를 만들어냈다.

“일엽편주(一葉片舟)에 몸을 싣고 네 모퉁이에 표주박을 묶어서 제주도에 세 번이나 드나들었지만 풍랑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다”는 『어우야담』의 기록 역시 배와 뱃길을 다루는 이지함의 뛰어난 능력과 능숙한 솜씨에 대한 놀라움의 표현이다고 하겠다.

더욱이 이지함은 자신의 탁월한 상재(商才)와 뛰어난 상술을 축재(蓄財)에만 쓰지 않고 백성들의 가난을 구제하는 일에도 십분 활용했다.

이지함은 가난을 구제할 때도 반드시 일정한 생산 능력을 갖추도록 가르친 다음 생산한 물건을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꾸려나가도록 했다. 이때에도 이지함은 사람들에게 각자의 능력과 수준에 맞게끔 기술을 가르치고 생산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특별히 노력했다.

일종의 공장제 수공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선진적인 경영 방식을 도입해 백성들의 가난을 구제하려고 한 이지함의 모습을 살펴보자.

“이지함은 백성들이 떠돌아다니며 다 헤진 옷에 음식을 구걸하는 모습을 불쌍히 여겼다. 이에 가난하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큰 움막을 짓고 거처하도록 하고 수공업을 가르쳤다. 사농공상(士農工商) 가운데 일정한 직업을 선택하도록 설득한 다음 직접 얼굴을 맞대고 귀에다 대고 일일이 타일러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각자 그 의식(衣食)을 마련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능력이 뒤떨어진 사람에게는 볏짚을 주어서 짚신을 삼도록 했다. 몸소 그 작업의 결과를 따져서 하루에 열 켤레를 만들어내면 짚신을 시장에 내다 팔도록 했다. 하루의 작업으로 한 말의 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그 이익을 헤아려서 옷을 만들도록 했다. 이렇게 하자 두어 달 동안에 사람들의 의식(衣食)이 모두 넉넉해졌다.” 유몽인, 『어우야담』

이지함이 살았던 조선의 16세기는 이제 막 지방 장시와 시장 경제가 번성하면서 민간의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와 농본상말(農本商末)의 국가 정책 탓에 상업과 상인은 여전히 천대받고 멸시 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지함은 나라와 백성과 개인을 부유하게 할 수 있다면 마땅히 상업을 중시해야 한다고 여기고 몸소 상인이 되어 막대한 재물을 축적하는 상재와 상술을 보여주었다.

그는 몇 백 년을 앞서 상선과 뱃길을 이용한 선진적인 상업 방식과 공장제 수공업 생산이라는 선진적인 경영 방식을 조선 사회에 도입한 ‘최초의 양반 사대부 출신 상인’이었다고 평가해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