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경산수화와 진경시

[이덕무 詩의 온도]⑨ 과천 가는 길에

2020-04-20     한정주 역사평론가
겸재

밭 사이 가을 풍물, 눈이 온통 즐겁고            田間秋物眼堪娛
완두는 가늘며 기다랗고 옥수수는 거칠고 굵네    豌豆纖長薥黍麤
아구새 서리 맞아 반질반질 빛이 나고            鴉舅受霜光欲映
기러기 추위 피해 그림자 늘어뜨렸네             雁奴辭冷影初紆
소나무 장승 무슨 벼슬 얻어 머리에 모자 썼나    松堠何爵頭加帽
돌부처 사내인데 입술 붉게 칠했구나             石佛雖男口抹朱
저녁노을 질 때 절뚝거리는 나귀 재촉하니        催策蹇蹄斜照斂
외양간 앞 남쪽 밭두렁이 바로 큰 길이네         牛宮南畔是官途
『아정유고 2』(재번역)

[한정주=역사평론가] 18세기 조선을 ‘진경시대’라고 부른다. 진경시대의 문화예술을 장식한 양대 축은 진경산수화와 진경시문이었다.

진경산수화가 조선의 산천(山川)과 강호(江湖)의 실경을 그림으로 묘사했다면 진경시문은 언어로 표현했다. 그래서 진경산수화와 진경시문은 마치 한 뿌리에서 나온 다른 가지처럼 닮았다.

더욱이 진경산수화를 그린 화가와 진경시문을 지은 시인은 마음을 함께 하는 벗처럼 친밀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겸재 정선이다. 그렇다면 진경시문의 대가는 누구였을까.

먼저 겸재 정선의 절친인 사천 이병연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사천 이병연의 뒤를 이은 진경시문의 대가로는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 ‘백탑파’ 시인이 있다.

이런 까닭에서일까. 이서구는 이덕무의 시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진경(眞景)을 묘사하여 시어(詩語)가 기이하다.”

자기 주변의 일상을 소품문(에세이)으로 표현하는 데 뛰어났던 최고의 에세이스트 이덕무는 또한 시적 언어를 통해 일상의 풍경을 묘사하는 데에도 탁월했던 최고의 시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