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이 꿈꾼 조선…신권정치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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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이 꿈꾼 조선…신권정치의 나라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3.04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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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위대한 패배자들···정도전②

▲ 정도전(왼쪽)과 태종 이방원
이방원이 그토록 혐오한 정도전의 신권 정치란 도대체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하면 재상이 국정 운영의 중심이 되어 통치하는 것이다.

물론 임금이 모든 권력의 주체였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요즈음의 입헌군주제에 가깝다고 이해하면 쉬울 듯싶다. 그런데 정도전은 왜 이러한 주장을 했던 것일까?

조선은 강력한 군사적 기반을 갖춘 이성계 세력과 유교적 이념과 정치철학으로 무장한 정도전과 조준 등의 지식 엘리트 집단의 결합에 의해 탄생한 나라였다.

그런데 정도전은 유교 국가가 이상으로 삼은 ‘민본과 왕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임금의 권력 행사를 제한하고 자신과 같은 지식 엘리트 집단에서 나온 재상이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그러한가?

부자세습을 정통으로 한 왕조 국가에서 임금이란 성군과 현군이 나올 수도 있지만 또한 암군(暗君 : 무능하거나 변변치 못한 임금)이 나올 수도 있다. 더욱이 폭군이 나올 가능성 역시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비록 암군과 폭군일지라도 임금의 자리란 함부로 바꾸거나 폐지하기가 어렵다.

반면 재상이라는 존재는 유학자, 곧 지식 엘리트 집단에서 가장 현명하고 유능한 인물을 고르는 일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무궁하다. 또한 임금은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없지만 재상은 변변치 못하거나 잘못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정도전은 무능하고 변변치 못한 임금이 나오더라도 훌륭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재상만 있다면 민본과 왕도의 이상을 이루는 데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임금의 역할이란 현명한 재상을 제대로 뽑는 것에 있을 뿐이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이러한 자신의 정치 구상을 이렇게 밝혔다.

“재상은 위로는 임금을 받들고, 아래로는 모든 관리를 통솔하며 만민을 다스린다. 따라서 그 직책의 권한이 매우 크다. 임금의 자질에는 어리석은 자질도 있고, 현명한 자질도 있으며, 강력한 자질도 있고, 유약한 자질도 있어서 한결같지가 않다. 재상은 임금의 아름다운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바로잡으며, 옳은 일을 받들고 옳지 않은 것은 막아서, 임금으로 하여금 균형을 잡도록 해야 한다.” -『조선경국전』 ‘총서’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와 자신의 관계가 이러한 모델의 전형이라고 여겼다. 그는 유방과 그를 보좌해 한나라를 세운 장량을 두고 “한나라 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고조를 이용해 한나라를 세웠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이것은 이성계의 역할은 정도전 자신을 신하로 얻는 것에 불과했고 실제 이성계를 이용해 조선을 세우고 통치하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정도전은 훌륭한 임금에 대해 이렇게까지 말했다.

“임금은 자신의 속마음을 비우고 스스로를 낮춰서 아래에 있는 현명한 재상에게 순응하여 따라야 한다.”

뜻을 앞세워 스스로 통치할 마음을 품지 말고 오로지 현명한 재상의 말에 따라 나랏일에 임하라는 주문이다. 그런 점에서 ‘신권 정치’는 곧 ‘철인 정치’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자면 정도전이 개국 초 막강한 정치적·군사적 기반을 갖춘 채 강력한 왕권을 추구한 이방원과 그 형제들을 배척하고 불과 11살밖에 안 된 이방석을 왕세자로 삼은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모든 권력은 왕으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 이방원의 ‘왕권주의’는 정도전이 꿈꾼 조선과는 정면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훌륭한 임금의 자질이 현명한 재상에 순응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어린 이방석보다 더 적합한 왕의 재목은 없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이러한 처사를 두고서 정도전이 ‘세력이 없고 변변치 않아 제어하기가 쉽다’고 여겨 이방석을 세자로 세웠다면서 왕실을 능멸한 짓이라고 분노했다. 정도전과 이방원의 정치 대립과 충돌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았다.

신권 정치의 창시자와 강력한 왕권의 주창자가 한 시대에 더불어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신권 정치의 가장 심각한 위협이 ‘이방원’이었다면, 왕권주의의 가장 해로운 적은 ‘정도전’이었다.

▲ 삼봉집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격돌

‘신권’과 ‘왕권’을 둘러싼 정도전과 이방원의 정치 투쟁은 개국 초부터 불을 뿜었다. 첫 대결은 정도전의 ‘완승’이었다.

태조가 즉위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1392년 8월20일 ‘개국 공신’이 발표되었다. 이때 이방원은 정도전 세력에게 크게 한 방 먹었다.

개국공신은 향후 권력의 향방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 공신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것도 중요했지만 정작 핵심은 3등급 중 몇 등급에 자신의 이름이 있는가였다.

이방원은 당연히 자신은 1등 공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1등 공신 17명, 2등 공신 11명, 3등 공신 16명의 어느 한 곳에도 이방원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았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이날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이복동생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다는 발표가 함께 나왔다는 것이다.

태조 이성계에게는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와의 사이에서 난 여섯 아들과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두 아들까지 모두 8명의 왕자가 있었다. 그런데 이성계는 이들 중 가장 어린 여덟 째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적장자 승계의 원칙에 따르면 당연히 맏아들 진안공 이방우가 세자가 되어야 했고, 만약 개국에 끼친 공적으로 따지자면 세자의 자리는 다섯 째 아들 정안공 이방원의 몫이어야 했다.

결국 같은 날 동시에 발표된 ‘개국 공신과 세자 책봉’은 모두 이방원을 철저하게 무력화시켜 권력의 주변에서 내쫓는 조치나 다름없었다.

이방원은 이 모든 것이 정도전과 신덕왕후 강씨의 합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이방원은 정도전이 정국을 자기 뜻대로 이끌고 가기 위해 치밀한 계획 하에 자신의 정치 생명을 끊어버렸다고 확신했다. 이방원은 분노했지만 울분을 삼키고 훗날을 기약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공신 중의 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방원이 이날 이후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한 반면 정도전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 날로 커져갔다.

그는 국가의 최고정책결정기구였던 도평의사사의 최고 책임자인 동판사와 경제문제를 총괄 책임지는 호조 판사, 인사 행정을 총괄하는 상서사 판사에다가 이성계의 친위 병력인 의흥친군위의 부책임자 격인 절제사를 겸직했다.

정치·경제·인사·행정·군사의 모든 권한이 정도전의 손에 의해 집중되었다고 할만 했다. 바야흐로 정도전이 꿈꾼 ‘신권 정치’의 이상이 서서히 실현되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방원 역시 모든 힘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이방원을 달래기 위해 태조가 특별히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동북면 가별치의 500여 호를 하사했고, 그후 다시 여러 왕자와 공신들을 각 도의 절제사로 삼을 때 전라도를 맡겼기 때문이다.

절제사란 각 도의 군사 행정을 총괄하는 지역 군사령관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는데, 특히 자신이 직접 군사를 모집하고 지휘할 수 있는 사병 집단을 합법적으로 거느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이방원에게는 훗날 사용할 무력의 기반을 갖출 절호의 기회였다. 여말선초의 격동기를 온 몸으로 겪은 이방원은 군사력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인물이었다. 제2차 왕자의 난(1400년)이 성공한 직후 이방원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 집안의 일을 보더라도 태상왕(태조)께서 병권을 잡았기 때문에 고려 말년에 이르러 가문이 일어나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무인년(1398년) 정도전과 남은의 난 때 우리 형제가 만약 군사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제 때에 일어나 난리를 제압할 수 있었겠느냐?”

이방원 못지않게 격랑의 세월을 헤쳐 온 정도전 또한 ‘권력은 무력을 통해 나온다’는 생각에서는 이방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도전이 1398년 3월 요동 정벌을 명분으로 내세워 태조에게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관군으로 통합할 것을 강력하게 건의한 까닭 역시 여기에 있었다. 이방원과 그 형제들의 군사력을 그대로 둘 경우 권력의 향방도 정치적 안정도 요원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정도전은 남은과 더불어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구체적인 방책으로 ‘각 도의 절제사를 폐지하고 모든 병사들을 관군으로 통합할 것’을 주청했다.

“전하께서 임금이 되시기 전에 일찍부터 군사를 장악하고 있지 않았던들 어떻게 오늘날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신 같은 자가 어떻게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개국 초에는 여러 왕자와 공신들로 하여금 군사를 맡게 한 것이 마땅했지만 이제 즉위하신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여러 절제사를 혁파하고 합하여 관군을 만들면 모든 것이 안전할 것입니다.”

태조는 이 건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태조의 허락을 얻은 정도전은 사병 혁파를 매섭게 밀어 붙였다.

엄격하게 따져볼 때 조선은 개국한 이래 관군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국가의 군사력은 각 도의 절제사가 된 왕자와 공신들이 지닌 사병 집단의 연합체나 다름없었다. 각 지역에서 도성으로 올라온 병사들 역시 각 도의 절제사에게 모병 및 지휘권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 사병에 가까웠다.

태조와 정도전의 직접 지휘 하에 있는 국왕 친위병인 의흥친군위와 세자 이방석이 거느린 군사는 겨우 1000여 명을 넘을 정도였다.(『정도전을 위한 변명』 참조).

이렇듯 만약 왕자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군사력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정도전은 절제사의 폐지를 통한 사병 혁파와 관군으로의 통합 작업을 서둘렀던 것이다. 정도전은 이때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끔 이방원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어놓을 심산이었다.

1392년 첫 번째 대결 이후 6년여 동안 잠잠했던 정도전과 이방원의 정치적 격돌은 다시 점화되었다. 권력을 휘두른 쪽은 여전히 정도전이었기 때문에 첫 번째 대결 때처럼 이 싸움 역시 그의 ‘완승’으로 끝나는 듯싶었다.

특히 이방원의 숨통을 옥죈 정도전의 공세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17일 전인 1398년(태조 7년) 8월9일 정점에 이르렀다. 이때 요동정벌을 위한 군사(진법) 훈련에 태만하거나 불참했다는 죄를 물어서 절제사, 상장군, 대장군 등 292명을 처벌했는데 이방원에게는 태형 50대의 형벌이 내려졌다.

물론 왕자의 신분인 이방원을 직접 처벌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의 부하가 대신해 형벌을 받았다.

이날의 형벌은 사병 혁파에 비협조적인 이방원과 여러 왕자들에게 확실하게 경고를 보내기 위해 취한 조처였다. 특히 이때 정도전은 최후의 승부수를 던졌다. 태조의 명을 빌어서 세자 이방석의 친형인 이방번의 군사를 제외한 이방원과 그 형제들이 거느린 군사를 해산하고 모든 병장기를 불태워 버리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정도전은 여기에서 평소 그답지 않게 치밀하지 못했다.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이 명령대로 사병과 병장기를 실제 해산하고 불사르는지 철저하게 통제, 감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조실록』의 기록에는 당시 이방원이 “군사를 해산하고 군영의 병장기를 모두 불에 태워 버렸다”고 해 태조와 정도전의 명령을 스스로 충실히 이행한 것처럼 적고 있다. 그런데 바로 뒤를 이어서 이방원의 부인 민씨가 “몰래 병장기를 준비하여 변고에 대응할 계책을 세웠다”고 했다.

승리의 기쁨을 누리느라 방심했던 것일까? 이방원의 숨통을 끊는 최후의 승부수를 던져놓고도 뒤따를 저항을 전혀 예상하지 못할 만큼 정도전의 행동은 허술했던 것이다. 그 틈을 이용해 그동안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던 이방원은 정도전에게 치명적인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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