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의 천진한 본성과 처녀가 자신을 감추는 순수한 진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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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의 천진한 본성과 처녀가 자신을 감추는 순수한 진정성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8.24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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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③ 동심(童心)’의 미학②

[한정주=역사평론가] 이덕무는 자신이 글을 쓰는 바탕에는 어린아이의 천진한 마음과 처녀의 순수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 글은 ‘진정(眞正)’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말한다.

천진한 마음과 순수한 마음은 가식(假飾)이나 인위(人爲)가 아닌 ‘진정성(眞正性 혹은 眞情性)’을 공통분모로 삼는다. 그러므로 이덕무에게 글쓰기의 원천이자 동력은 다름 아닌 ‘진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덕무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많이 배우고 지식을 쌓는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억지로 힘쓴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라고.

오히려 어떠한 거짓 꾸밈이나 인위적인 작용을 가하지 않아야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고 처녀처럼 순수한 ‘진정(眞正 혹은 眞情)’ 그대로를 표현하는 글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글을 쓰는 사람은 모름지기 그저 자신의 천진하고 순수한 진정성, 다시 말해 진실한 감정과 마음 그리고 뜻과 의지를-가식적(假飾的)으로 꾸미거나 인위적(人爲的)으로 다듬지 않고-있는 그대로 드러내 표현할 뿐이다.

“어린아이가 네댓 살이나 예닐곱 살에 이르게 되면 날마다 재롱을 피운다. 예컨대 닭의 깃을 머리에 꽂고 파 입을 입으로 뚜뚜 불면서 벼슬아치 놀이를 한다. 나무나 대나무로 제기(祭器)를 만들어 차려놓고 법도와 격식에 따라 행동하면서 학궁(學宮: 성균관) 놀이를 한다.

또한 요란스럽게 고함치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눈을 부릅뜨고 손톱을 세워 번쩍 달려드는 호랑이나 사자 흉내를 내다가 정중한 발걸음으로 섬돌에 올라 손님과 주인이 되어 접대하는 놀이를 한다.

또한 가는 대나무로 마차 옆을 따르는 말(馬)을 만들고, 밀랍으로 봉황을 만들고, 바늘로 낚시 대를 만들고, 물동이로 연못을 꾸민다.

무릇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이면 본받아 배우지 않는 것이 없다. 참으로 천연(天然) 그대로 스스로 얻은 것이라도 있으면 활짝 웃고 훨훨 춤추다가 목청껏 구슬픈 노래를 하고, 때로는 갑자기 엉엉 울다가 별안간 고함을 지르기도 하며, 아무 이유 없이 슬픈 표정을 짓는다.

하루 동안 백 가지 형상과 천 가지 마음으로 변화하지만, 왜 그렇게 되고 왜 그렇게 하는지 알지 못한다.

처녀는 실띠를 매기 시작하는 네댓 살 때부터 비녀를 꽂는 열다섯 살 때에 이르기까지 집안에서 온화하고 단정한 몸가짐을 하고 예의와 법도를 배우고 스스로 지킨다. 어머니를 따라 음식을 만들고 바느질하고 길쌈하는 일을 배우며, 여자 어른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거지와 말할 때와 웃을 때를 가려 배운다.

밤이 되면 반드시 등촉(燈燭)을 밝히고 낮에는 부채와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조정(朝廷)에 있는 것처럼 엄숙하게 처신하고, 신선(神仙)과 같이 세속을 멀리하며 어울리지 않는다.

요도(夭桃)와 사균(死麕)의 음란한 시는 부끄러워 읽지 못하고, 탁문군(卓文君)과 채문희(蔡文姬)의 일은 한(恨)을 품을까 봐 말하지 않는다. 이모나 고모의 친척 여자 동기간이 아니면 한자리에 앉지 않고, 소원한 친척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부모의 말씀이 있어야 형제(兄弟)들을 따라 겨우 절한 뒤 등불을 등지고 벽을 향해 앉아서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몸둘바를 몰라 한다.

간혹 중문(中門) 안에서 노닐다가 멀리서 발자국 소리나 기침 소리가 들리면 달아나 깊이 몸을 감추기에 여념이 없다.

아! 어린아이여, 처녀여!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한 것인가? 어린아이가 장난치며 재롱을 부리는 것이 과연 인위(人爲)이겠는가? 처녀가 부끄러워 감추는 것이 과연 가식(假飾)이겠는가?

이 『영처고(嬰處稿)』를 쓴 사람이 글을 저술하고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는 것이 또한 어린아이나 처녀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이덕무,『청장관전서』, ‘영처고 자서’

어린아이의 놀이는 결코 꾸미거나 작위(作爲)적이지 않으며, 처녀의 부끄러워 감추는 마음은 거짓이거나 가식이 아니다. 그래서 이덕무는 이렇게 말한다.

“장난치며 즐기는 것은 어린아이만한 이가 없다. 그러므로 어린아이가 재롱을 부리는 것은 참으로 천진(天眞)한 본성이다. 또한 지극히 부끄러워하는 것은 처녀만한 이가 없다. 그러므로 처녀가 자신을 감추는 것은 참으로 순수한 진정(眞正 혹은 眞情)이다.

그런데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 장난치며 즐기고 재롱을 부리거나 부끄러워 감추는 것을 지극히 하는 사람을 꼽자면 나만한 사람이 없다.

이러한 까닭에 나는 이 원고를 ‘영(嬰: 어린아이)’ 자와 ‘처(處: 처녀)’ 자를 빌어 『영처고(嬰處稿)』라고 부른 것이다”라고.

이덕무가 어린아이의 천진한 마음과 처녀의 순수한 마음을 바탕 삼아 글을 쓴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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