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의 기습 공격에 당하다···정도전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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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의 기습 공격에 당하다···정도전의 최후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3.06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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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위대한 패배자들···정도전③

▲ 삼봉 정도전. 1398년 8월26일 정도전은 이방원의 ‘하룻밤의 기습 공격’에 최후를 맞았다. 한 순간의 방심이 부른 참혹한 패배였다.
1398년(태조 7년) 8월26일자 『태조실록』의 기록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제1차 왕자의 난’의 진행 경로를 추적해 보면 정도전의 패배와 죽음은 전혀 극적이지도 장렬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처참하고 굴욕적일 뿐이었다.

이방원의 기습 공격은 아주 치밀한 계획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정도전은 아무런 낌새도 알아채지 못한 채 완전 무방비 상태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했기 때문이다.

이날 쿠데타에 도화선의 역할을 한 사람은 이방원의 부인 민씨였다. 이방원이 정도전 세력을 기습 공격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당사자가 바로 그녀였다.

쿠데타 성공의 여부는 대개 적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함께 공격의 시점을 어떻게 포착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두 가지 측면에서 민씨는 모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8월26일 신시(申時 :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경 민씨의 동생 민무질이 이방원의 집에 찾아왔다. 그런데 민무질과 한참 동안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민씨는 다급하게 하인 소근을 불러서 말했다.

“너는 빨리 대궐에 가서 정안공(이방원)을 오시라고 청해라.”
그러자 소근이 답했다.
“여러 왕자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는데 제가 무슨 말을 아뢰어야 하겠습니까?”
이에 민씨는 자신의 병을 핑계대어 어떻게든지 이방원이 빠져나오게끔 하라고 엄하게 지시했다.
“네가 갑자기 가슴과 배가 몹시 아프다고 아뢰어라. 그러면 반드시 급히 서둘러 오실 것이다.”

도대체 민무질을 만난 민씨가 그토록 다급하게 이방원을 찾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민무질이 가져온 정보 때문이었다.

이때 민무질은 정도전과 핵심 측근들이 남은의 첩의 집에 다 같이 모여 술자리를 가질 것이라는 정보를 가져왔다. 허를 찌르는 기습 공격으로 정도전을 비롯해 이방원의 정적들을 단숨에 제거해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호였다.

문제는 어떻게 정도전 세력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재빨리 거사를 준비하고 군사 행동에 나설 것인가였다. 민씨는 이방원과 거사의 결정적 시기와 구체적인 계획을 서둘러 의논하기 위해 소근을 보낸 것이다.

이때 이방원은 태조의 병환이 위중해 여러 왕자들과 더불어 경복궁 근정문 밖 서쪽 행랑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다. 소근의 연락을 받은 이방원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고 부인 민씨와 민무질과 더불어 비밀스럽게 한참 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 이방원은 민씨의 또 다른 남동생인 민무구를 시켜 안산군수 이숙번에게 비밀리에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을 무장시켜 자신의 집 앞에 있는 신극례의 집에서 대기하고 있으라는 지시였다.

당시 이숙번은 도성 경비를 위해 군대를 이끌고 파견을 나와 있었다. 군사동원을 지시한 후 이방원은 곧바로 다시 근정문 밖 서쪽 행랑으로 돌아갔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해 혹시 있을지도 모를 정도전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어둠이 내리자 이방원은 즉시 말을 달려 대궐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집이 있는 동네 어귀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이숙번을 불렀다.

훗날 쿠데타에 성공한 이방원은 정도전이 임금이 위독한 틈을 이용해 여러 왕자들을 대궐로 불러들여서 참살하려고 했기 때문에 자신은 서둘러 말을 몰아 빠져나온 다음 군사를 모아서 역당(逆黨)을 제거했다고 했다. 정도전 세력을 제거한 것은 불가항력적인 자기 방어였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날 정도전이 이방원 세력의 움직임을 전혀 포착하지 못한 채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러한 ‘음모설’은 쿠데타의 정당성을 부각시키려고 이방원이 꾸민 거짓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어쨌든 이방원이 부르는 소리를 들은 이숙번은 장사 두 사람을 거느리고 갑옷 차림으로 나타났다. 이어 이방원의 핵심 측근인 이거이, 조영무, 신극례, 서익, 문빈, 심귀령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에 이방원의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이 함께 했다.

여기에서도 이방원의 부인 민씨의 역할은 두드러졌다. 이방원의 사병이 해산할 당시 그녀는 훗날의 쿠데타를 대비할 목적으로 몰래 병장기를 빼돌려 숨겨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씨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감춰둔 병장기를 나누어주었다. 이에 기병 10명, 보병 9명에 몽둥이를 든 하인 10명의 쿠데타 병력이 만들어졌고 여기에다가 다시 이숙번이 이끄는 정규 병력이 합세했다. 쿠데타의 본격적인 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쿠데타 군이 사용할 암호를 ‘산성(山城)’이라고 정한 다음 이방원은 맨 먼저 광화문의 삼군부(오늘날의 국방부)를 점령해 관군을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대궐을 포위한 채 광화문에서 남산에 이르는 모든 길목을 장악했다.

이때 세자 이방석이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군사를 이끌고 나와 싸우려고 했다. 그러나 궁궐의 남문에 올라 “광화문으로부터 남산에 이르기까지 쿠데타 군의 정예 기병이 꽉 차 있는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대궐 문을 열고 나오지 못했다. 이미 대궐 주변을 완전히 장악한 이방원은 이숙번을 불러 물었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에 이숙번이 대답했다.
“정도전을 비롯한 역적들이 모인 곳을 포위하고 불을 질러서 문밖으로 나온 놈은 즉시 죽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방원은 곧바로 정도전 등이 모여 있는 송현(지금의 한국일보사 근처)의 남은의 첩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소근과 보병 10명에게 그 집을 포위하게 했다.

이때 정도전은 문밖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남은 등과 등불을 밝히고 모여 앉아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근이 마루와 방 사이에 난 문을 엿보고 미처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숙번이 쏜 화살 세 개가 잇달아 지붕 기와에 떨어졌다. 놀란 소근과 병사들이 다시 동네 어귀로 나와서 화살이 날아온 방향이 어디인지 묻자 이숙번이 “내가 쏜 화살이다”고 답했다.

이에 다시 집을 포위하고 이웃하고 있는 집 세 곳에 불을 질렀다. 이때 정도전은 몸을 피해 전 판사(判事) 민부의 집으로 들어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민부는 이방원에게 “배가 불룩한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습니다”라고 고변했다.

이후 정도전의 죽음과 관련해 『실록』의 기록은 굴욕적이고 치욕스럽게 묘사한 말들로 가득할 뿐이다. 잠시 정도전의 최후를 언급한 『태조실록』의 기록을 들춰보자.

“(민부의 고변을 들은) 정안군(이방원)이 그 사람이 정도전인 줄 알고 소근 등 4인에게 시켜 잡아오도록 했다. 이때 정도전이 침실 안에 숨어 있었는데 소근이 그를 꾸짖어 밖으로 나오게 했다. 정도전은 작은 칼을 가지고 걸음도 걷지 못한 채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 소근이 꾸짖어 칼을 버리게 하자 정도전이 칼을 내던지고 문 밖에 나와서 말했다. “청하건대 죽이지 마시오. 한마디 말하고 죽겠습니다.”
『태조실록』 7년(1398년) 8월26일

죽을 때 죽더라도 ‘한마디’ 하고 죽겠다는 정도전을 이방원은 자신이 타고 있던 말 앞으로 끌어냈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정도전이 남긴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권력을 찬탈할 목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이방원을 준엄하게 꾸짖는 말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태조실록』이 남긴 정도전의 마지막 말은 그런 우리의 기대를 무참하게 짓밟아버린다. 정도전이 이승에서 한 마지막 말은 이랬다. 물론 이것은 패배자 정도전의 변론을 전혀 용납하지 않은 채 승리자 이방원이 남긴 일방적인 기록일 뿐이다.

“예전에 공(公)이 이미 나를 살려주었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 주소서.”

정도전은 조선을 개국하기 직전 정몽주에 의해 귀양길에 올랐다가 죽음의 위기에 처한 자신을 이방원이 구해준 사실을 떠올렸다. 당시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살해하는 바람에 정도전은 극적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정도전은 그때의 일을 거론하며 어떻게든지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걸한 셈이다. 비루하기 그지없는 장면이다. 정도전의 최후 간청(?)에 이방원은 더욱 크게 분노했다.

“네가 조선의 봉화백(奉化伯 : 정도전의 관작)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느냐? 어찌 악한 짓이 이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느냐?

그리고 이방원은 바로 그 자리에서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정도전의 목을 베어 버렸다. 1398년 8월26일, 그 ‘하룻밤의 기습 공격’에 정도전은 그렇게 최후를 맞았다. 한 순간의 방심이 부른 참혹한 패배였다.

그날 이후 정도전이 꿈꾼 조선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이방원의 세상이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

▲ 『불씨잡변』 초간본
◇그러나 조선은 정도전의 길을 선택했다

정도전은 철인 재상이 다스리는 ‘신권의 나라’를 꿈꾸었기 때문에 강력한 왕권주의자인 이방원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그후 조선의 왕실은 ‘불충과 굴욕’의 상징으로 정도전을 취급했다.

그렇다면 과연 조선은 진실로 정도전을 버렸던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조선은 정도전을 버리고서는 온전히 설 수도 또한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그런 나라였다.

먼저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과 정궁(正宮)인 경복궁 및 그 건물 하나하나에는 정도전이 꿈꾼 유교적 이상국가의 정신과 영혼이 깊게 배어 있다. 경복궁,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융문루 등의 이름은 모두 그의 작품이었다.

또한 그는 한양을 설계해 도성을 쌓고 시가지를 조성했으며 4대문의 위치 및 명칭을 직접 지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정도전의 국가 전략과 기획의 집합체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것은 조선이 존재하는 한 결코 부정할 수도 또 지울 수도 없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더욱이 개국 초 정도전이 『조선경국전』 등을 통해 기획한 유교국가 조선의 기본이념과 통치 원리의 대부분은 버려지기는커녕 훗날 제9대 성종 때 완성된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으로 더욱 빛을 발했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모태로 한 국가 차원의 법전 편찬 사업의 결과물이 바로 『경국대전』이었기 때문이다.

법전 편찬 사업 이외에도 조선이 정도전의 기획과 아이디어를 좇아 완성시킨 국가 정책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예를 들어보자.

오늘날 조선이 남긴 가장 큰 공적 중 하나로 자주 거론되는 것이 다름 아닌 ‘기록과 서적 문화’다. 이러한 문화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활자와 인쇄술의 발달’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조선에서 금속활자를 만드는 관청, 즉 주자소를 처음 설치한 임금은 정도전의 정적이었던 태종 이방원이다. 이후 세종 때에 이르러 활자와 인쇄술은 더욱 발달해 화려한 ‘문치’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활자와 인쇄술을 통한 문치를 최초로 기획한 사람은 태종 이방원이 아닌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서적포(書籍鋪)를 설치하는 시」라는 매우 독특한 시(詩) 한 편을 통해 “자신의 간절한 소망은 서적포를 설치하고 동활자(주자)를 만들어서” 유학의 경서는 물론 사서, 제자백가서, 의학서, 병법서, 법률 서적까지 모두 인쇄해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이 마음껏 읽을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정도전의 생각을 좇아서 태종과 세종은 주자소의 설치와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 및 서적 보급을 실행에 옮겼던 셈이다.

조선이 국시로 삼았던 ‘숭유억불’의 사상적 토대와 이론적 기초를 닦은 사람 역시 정도전이다. 윤회설, 선과 교, 자비설 등 불교 사상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 조목조목 논박한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辨)』이 없었다면 여말선초 유학이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불교를 그토록 쉽게 제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울러 『불씨잡변』은 유학이 조선시대 내내 불교의 특별한 저항과 도전이 없이 이데올로기적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사상의 원천이기도 했다.

정도전 사후 400여 년 가까이 지난 정조 15년(1791년)에 국가 차원에서 다시 정도전의 개인 문집인 『삼봉집』을 수정 편찬한 것이나 또 고종 2년(1865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도성(한양) 설계의 공적을 인정해 정도전에게 시호를 하사한 것은 모두 수백 년이 흘러도 도저히 지울 수 없을 만큼 그가 조선에 남긴 영향과 흔적이 깊고도 넓었기 때문이다.

“법궁(法宮 : 경복궁)의 전각들이 차례로 완성되었다. 정도전이 전각의 이름을 정하고 송축한 문구를 생각해보니 천 년의 뛰어난 문장으로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고종실록』 2년(1865년) 9월10일

그렇다면 조선의 임금들은 정도전에게 배은망덕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정도전이 구상한 기획과 아이디어를 좇아 공적을 이루는 은혜를 입었음에도 오히려 정도전을 만고의 역적이요 패륜아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정도전은 분명 ‘패배자’였다. 그러나 태종은 물론 그의 후계자인 세종과 성종이 모두 그가 주창하고 기획한 국가 전략을 좇아 문치의 나라 조선을 이루었다는 사실에서 보더라도 정도전은 역사 속에서 승리자로 계속 살아남아 있었던 셈이다.

정도전은 역적의 족쇄를 찬 채 육신은 도륙당하고 영혼은 짓밟히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정치·사회·문화·법률 등 각 분야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와 사상의 가치를 증명해보였다.

그 존재와 사상의 끈질긴 생명력 때문에라도 정도전은 ‘위대한 패배자’라는 영예로운 호칭으로 불려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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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후후 2014-05-11 22:58:22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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