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울 만한 곳이로구나!”…요동벌판 처음 본 연암 박지원의 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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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울 만한 곳이로구나!”…요동벌판 처음 본 연암 박지원의 탄성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9.16 08: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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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③ 동심(童心)’의 미학⑤
▲ 광활한 요동벌판의 광경을 처음 본 박지원은 주저 없이 “한바탕 울 만한 곳이로구나!”라고 말한다.

[한정주=역사평론가] 그렇다면 ‘동심의 미학’이 짙게 스며있는 조선의 산문으로는 어떤 것을 꼽을 수 있을까?

필자는 이덕무와 박지원이 남긴 수많은 글과 기록 속 곳곳에서 ‘동심의 미학’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구태여 동심(童心)이라 표현하지 않아도 읽는 사람이 그 천진하고 순수한 감정과 진실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공감할 수 있는 표현들이 너무나 멋지게 남아 있다.

그 대표적인 글이 『열하일기』의 ‘도강록(渡江錄)’에 수록되어 있는 일명 ‘호곡장론(好哭場論)’이다.

“산기슭에 가려서 백탑(白塔)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재빨리 말을 채찍질해 수십 보(步)를 가지 않아 막 산기슭을 벗어났는데 눈앞이 아찔해지면서 홀연히 한 무더기의 검은 공들이 일곱 번 오르고 여덟 번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았다. 사람의 삶이란 본래 무엇인가 붙잡거나 어디에 의지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을 밟은 채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한바탕 울 만한 곳이로구나! 가히 한 바탕 울 만한 곳이야!’라고 말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정진사가 ‘하늘과 땅 사이에 탁 트여 끝없이 펼쳐진 경계를 보고 갑자기 통곡(痛哭)을 생각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이 들기도 하겠네. 그러나 아니네. 아주 먼 옛적부터 영웅은 울기를 잘했고, 미인은 눈물이 많았지. 하지만 그들은 불과 몇 줄기 소리 없는 눈물을 옷깃에 떨어뜨릴 정도였네. 나는 아직껏 그들의 울음소리가 하늘과 땅 사이를 가득 채우고 마치 쇠나 돌에서 나오는 듯 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네.

사람들은 단지 칠정(七情) 가운데 오직 슬픈 감정만이 울음을 자아내는 줄 알 뿐 사실 칠정(七情) 모두가 울음을 자아낸다는 것은 알지 못하네. 기쁨(喜)이 지극해도 가히 울 수 있고, 노여움(怒)이 지극해도 가히 울 수 있고, 즐거움(樂)이 지극해도 가히 울 수 있고, 사랑(愛)이 지극해도 가히 울 수 있고, 미움(惡)이 지극해도 가히 울 수 있고, 욕망(欲)이 지극해도 가히 울 수 있지.

답답하게 맺힌 감정을 활짝 풀어버리는 데는 소리 질러 우는 것보다 더 좋은 치료법이 없다네. 울음이란 하늘과 땅 사이에 있어서 우레와도 비교할 만하지. 지극한 감정이 바깥으로 드러나 나오는 것이 저절로 이치에 맞는다면 울음과 웃음이 어찌 다르겠는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이렇듯 지극한 감정을 겪어보지 못하다 보니 공연히 칠정(七情)을 늘어놓고 슬픈 감정에 울음을 짜 맞춘 것이네. 이로 말미암아 초상(初喪)을 당하면 처음에는 억지로 ‘아이고! 아이고!’ 하고 울부짖으면서 오히려 진실로 칠정(七情)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한 소리와 참된 소리를 억눌러 버린다네. 그러니 하늘과 땅 사이에 쌓이고 맺혀서 꽉 뭉쳐 있게 되고 말았지.

한(漢)나라 때의 저 가생(賈生)이란 이는 한 바탕 울 만한 곳을 얻지 못하고 견디다 참다못해 별안간 선실(宣室)을 향해 한번 큰 소리로 길게 울부짖었지. 어찌 사람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에 정진사가 다시 물었다. ‘지금 울 만한 곳이 저토록 넓으니 저도 선생과 같이 한바탕 통곡을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통곡하는 까닭을 칠정(七情) 가운데 무엇에서 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감정을 골라잡아야 하겠습니까?’ 나는 말했다.

‘그것은 갓난아기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이네. 갓난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느낀 감정이 무엇이겠는가? 그 갓난아기가 처음 본 것은 해와 달이고, 다음에는 눈앞에 가득 서 있는 부모와 친척들을 보겠지. 어찌 즐겁고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기쁨과 즐거움이 늙을 때까지 두 번 다시 없을 것인데 슬퍼하고 노여워할 까닭이 있겠는가? 응당 기쁜 감정이 일어나 웃을 일인데 도리어 분노하고 한스러운 감정이 가슴 가득하여 끝없이 울기만 한다네.

그래서 인간의 삶이란 신성한 성인(聖人)이든 우매한 범인(凡人)이든 죽기는 매 한 가지이고 살아가면서 온갖 우환(憂患) 역시 두루 겪어야 하기 때문에 갓난아기가 태어난 것을 후회하고 먼저 스스로 울음을 터뜨려 자신을 조문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하지.

그러나 그것은 갓난아기의 본래 감정과는 크게 어긋나는 말이네. 아기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동안 어둡고 막혀서 답답하게 지내다가 어머니의 뱃속을 벗어나 하루아침에 갑자기 탁 트이고 훤한 곳으로 나와 손을 펴보고 다리를 펴보게 되자 마음과 정신이 넓게 활짝 트이는 것을 느낄 것이네. 어찌 참된 소리와 감정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크게 한번 발출(發出)하고 싶지 않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에는 거짓 꾸밈이 없다는 것을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이네.” 박지원,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7월8일(갑신일)

광활한 요동벌판의 광경을 처음 본 박지원은 주저 없이 “한바탕 울 만한 곳이로구나!”라고 말한다. 이 한 마디는 어머니의 뱃속을 벗어나 처음 탁 트이고 훤한 세상을 만난 갓난아기의 거짓 없는 울음소리와 같은 천진난만하고 진솔한 감정이 있는 그대로 담겨 있다.

여기에는 어떤 이성적 사유나 논리적 사고도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호곡장론’을 읽고 있는 순간 ‘요동벌판’을 보지 않았지만 마치 박지원의 시선을 따라 ‘요동벌판’을 보고 있는 듯한 상상의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박지원과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시간과 공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그 거짓 없고 꾸밈없는 진솔한 감정과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어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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