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막힘없는 까닭과 물고기가 깊이 잠겨있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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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막힘없는 까닭과 물고기가 깊이 잠겨있는 까닭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9.24 07: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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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161)

[한정주 역사평론가] 구름을 보면 깨끗하면서도 막힘이 없는 까닭을 생각해야 한다.

물고기를 보면 물속을 헤엄쳐 다니면서도 깊이 잠겨 있는 까닭을 알아야 한다.(재번역)

見雲 思所以潔而無滯 見魚 知所以泳而有潛.

글을 쓰거나 혹은 예전에 쓴 글들을 읽다 보면 가끔 야누스와 같이 완전히 다른 나를 발견하곤 한다. 어떤 때는 세상 모든 것을 정복한 듯 호기롭다가도, 어떤 때는 세상 모든 것이 싫어지는 지독한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한다.

김수영은 글쓴이의 이러한 자가당착을 곡예사의 삶에 비유한 적이 있다.

“문학에는 숙명적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곡예사적 일면이 있다. 이것은, 신이 날 때면 신이 나면서도 싫을 때는 무지무지한 자기혐오를 불러일으킨다.”(김수영, 『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열음사, 1984, p140.)

글을 쓰는 것이 단지 나 자신을 표현하고 스스로 만족하는데 있다면 아마도 이러한 자기혐오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글은 반드시 다른 사람이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 것들이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간혹 세상에 내놓지 않은 글조차 노트북에 저장해두거나 그마저도 안심이 안 되서 이메일의 ‘내게 쓴 메일함’에 꼭꼭 저장해 두는 심리는 무엇인가?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내놓으려고 하는 욕망 때문이고, 혹시 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누군가 그것들을 찾아내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렇지 않다면 왜 쓰레기나 다름없는 글들을 휴지통에 던져버리지 못하고 미련스럽게 붙잡고 있는가?

여기 이덕무의 글을 나는 이렇게 해석해본다.

구름을 볼 때는 세상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드넓은 하늘을 정처 없이 떠다니는 뜻을 생각하고, 물고기를 볼 때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물속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뜻을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이따금 나를 엄습하는-김수영이 ‘숙명적’이라고까지 말한-글을 쓴다는 것의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모를 일이고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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