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거대한 그림…조물주는 대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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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거대한 그림…조물주는 대 화가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9.25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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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162)
▲ 허백련의 추경산수. <개인 소장>

[한정주 역사평론가] 세계는 거대한 그림이고, 조화옹(造化翁)은 대 화가이다.

주황색으로 요염하게 붉게 물든 오구목(烏舅木) 꽃은 누가 붉은 물감을 칠하고 붉은 빛깔의 돌과 산호 가루를 뿌려 그려 놓았는가? 복숭아 꽃잎에는 연지처럼 붉은 즙이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다.

가을 국화 꽃빛은 등황색(藤黃色)을 곱게 바른 것만 같다. 눈이 개고 피어오르는 푸르스름한 기운에는 푸른 빛깔이 두 겹 세 겹 엇갈려 먼 곳과 가까운 곳에 골고루 나뉘었다.

세찬 소낙비가 강 위를 내달려서 수묵(水墨)을 가득 뿌려놓으면 채색할 틈도 없게 되고, 잠자리의 눈동자는 녹색 빛이 은은하고, 나비의 날개는 금빛으로 물들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천상에 채색을 담당한 성관(星官)이 있어서 풀과 꽃과 돌과 금의 정수(精髓)를 모았다가 조화옹에게 제공해 온갖 사물의 빛깔을 입히게 한 것이 아닐까?

그래도 가을 강 석양(夕陽)의 거대한 그림이 가장 좋다. 이것이야말로 조화옹이 뜻을 얻은 그림이라고 할 만하다.(재번역)

世界大粉本 造化翁大畫史 烏舅樹冷艶而老紅 誰其設銀硃赭石珊瑚末耶 桃花瓣臙脂綿 汁滴滴欲漬 秋菊色藤黃鮮 抹雪晴烟嵐 二靑三靑 匀分遠近 急雨奔江 滿灑水墨 渲染無罅 蜻蜓眼石綠隱隱 蝶翅暈以乳金 意者天上有一星官主彩色 收草花石金精英 以供造化翁 着色萬品耶 秋江夕陽粉本㝡好 此造化翁得意筆也.

문득 니체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이라는 글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인용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다른 세계를 소생시키는 것은 오직 어린아이와 예술가의 유희(혹은 놀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는 세상의 창조와 생성은 어린아이의 놀이와 같은 신들의 놀이일 뿐이라고 하면서 심지어 신 중의 신 제우스를 가리켜 ‘세계의 어린아이’라고까지 말했다.

여기 세계를 화판 삼아 그림을 그리는 조물주 역시 무슨 위대한 작업과 거룩한 행위를 하는 전지전능한 창조자가 아니라 그냥 놀이 삼아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일 뿐이다.

여시아상(如是我想), 나는 이렇게 생각해본다. 전지전능한 자의 거룩한 역사(役事)로 창조된 세계보다는 차라리 예술가가 그림을 그리듯 어린아이가 놀이를 하듯이 창조하는 세계가 훨씬 더 낫지 않을까?

최소한 그런 세계에서는 창조자의 ‘해야만 한다’는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명령보다는 예술가와 어린아이의 ‘하고 싶다’는 상대적이고 개성적인 욕망이 존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는 거대한 그림이고, 조물주는 대 화가’라고 묘사한 이덕무의 글에는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것에서 탈주해 상대적이고 개성적인 것을 포착하려고 했던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참신한 사고와 독특한 미학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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