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확한 것과 애매모호한 것…‘생각한 것’이 아니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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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한 것과 애매모호한 것…‘생각한 것’이 아니라 ‘믿었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10.01 08: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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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163)

[한정주 역사평론가] 나서 땅에 떨어진 것은 크게 깨달은 것이고, 죽어서 땅에 들어가는 것은 크게 잊는 것이다.

깨우친 뒤는 한계가 있고, 잊은 이후는 무궁한 것이다. 나고 죽는 사이는 주막집이니 한 기운이 머물러 자고 가는 곳이다.

저 벽의 등잔이 외로이 밝다가 새벽에 불똥이 떨어지면 불꽃이 걷히고 기름도 또한 어느새 적연(寂然)해진다.

외로이 밝은 것이 궁진한 것인가, 적연한 것이 한계가 있는 것인가.

其生而墮地也 大覺 其死而入地也 大忌 覺以後有限 忘以後無窮 生死中間 是郵舍也 一氣之留宿而過去處也 夫彼壁燈兀兀明也 曉來燼落焉 則焰收而膏氣 亦斯須寂然也 其兀兀明者窮乎 寂然者有限乎. 『이목구심서 1』

사람은 애매모호한 것보다는 명확한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치와 진리라는 놈은 명확한 것보다 애매모호한 것 속에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이른바 역사 속에서 명확하다고 주장한 것들의 목록을 작성해 살펴보라. 설령 당대 혹은 후대에 와서 명확한 것으로 인식되거나 인정받았다고 해도 그 시기는 한 때일 뿐이다.

오히려 명확한 것일수록 명확하지 않은 것으로 비판받거나 반박 당했다.

나도 한때 마르크스주의를 ‘명확한 것’이라고 믿었던 적이 있다. ‘생각한 것’이 아니라 ‘믿었다는 것’을 잊지 마라. 명확한 것이란 대부분 ‘생각한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일 가능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한때 나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진리의 명확성’을 여지없이 부숴버린 이들이 다름 아닌 수학자 괴델, 화가 에셔, 음악가 바흐였다.

‘진리의 명확성’에 맞서 ‘애매모호한 것의 진리’를 증명했던 그들의 생각과 작업을 다룬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이라는 책을 읽고 난 20세기 말과 21세기 초 이후 비로소 나의 정신세계는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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