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고(法古)하되 구속받지 않아야 하고 창신(創新)하되 아무렇게나 써서는 안 된다”
상태바
“법고(法古)하되 구속받지 않아야 하고 창신(創新)하되 아무렇게나 써서는 안 된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10.15 07: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④ 옛것과 새것의 변통과 통섭…법고(法古)와 온고(溫故)의 미학①
▲ 문봉선, 풍죽도 VII, 비단에 수묵담채, 143×369cm. 2014. <포스코미술관 제공>

[한정주=역사평론가] 필자는 앞서 좋은 글의 첫 번째 조건으로 ‘참신하고 창의적인 글’을 강조했다. 또한 새롭고 창의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죽은 글’이요 ‘가짜 글’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새롭고 참신하고 창의적인 것이라면 무조건 좋은 글인가? 그렇지 않다. 아무렇게나 함부로 글을 짓고, 글쓰기를 가볍고 쉽게 여겨 자기 멋대로 한다면 구태여 ‘문장의 미학과 철학’이 왜 필요하겠는가?

그렇다면 새롭고 참신하고 창의적인 글을 쓰면서도 아무렇게나 함부로 짓거나 자기 멋대로 짓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박지원이 주창한 “옛것을 바탕 삼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철학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박지원의 글쓰기 철학은 제자인 박제가의 시문집인 『초정집(楚亭集)』에 써준 서문(序文)에 고스란히 남아 전해오고 있다. 이 서문은 박제가의 나이 23세 때인 1772년(영조 48년)에 써 준 것이다. 박지원이 박제가보다 13세가 많으니 박지원의 나이 36세 때였다.

“어떻게 문장을 지어야 하는가? 이 문제를 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세상에는 옛것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면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은 왕망(王莽)의 『주관(周官)』으로 예악을 제정할 수 있으며, 공자와 얼굴이 비슷한 양화(陽貨)를 두고 오랜 세대의 스승이라고 하는 꼴이다. 어찌 옛것을 본받는다고 해서 문장이 되겠는가?

그렇다면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 때문에 세상에는 괴상한 헛소리를 지껄이며 도리에 어긋나고 편벽되게 문장을 지어 놓고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도량을 재는 기구보다 세 발이나 되는 장대가 낫고, 한나라 무제(武帝) 때 노래를 잘하기로 소문난 이연년(李延年)의 새로운 노래를 종묘 제사 때 부르는 꼴이다. 어찌 새롭게 창조한다고 문장이 되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인가?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장을 짓는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가?

이른바 옛것을 본받는다고 하는 사람의 큰 병폐는 옛것의 흔적에만 얽매이는 것이다. 또 새롭게 창조한다고 하는 사람의 큰 병폐는 지켜야 할 내용과 형식을 해치는 것이다. 참으로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화에 통달할 수 있고, 또한 새롭게 창조하면서도 내용과 형식에 잘 맞추어 글을 지을 수만 있다면 그러한 글이야말로 바로 지금의 글이자 옛글이기도 하다.” 박지원, 『연암집』, ‘초정집 서문(楚亭集序)’

박지원이 말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요체는 위에서 인용한 글 끝머리에 나오는 ‘법고이지변(法古而知變)’, 곧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화에 통달할 수 있고 ‘창신이능전(創新而能典)’, 즉 새롭게 창조하면서도 내용과 형식에 잘 맞추어 글을 짓는다는 것이다.

옛것을 본받되 옛것의 틀에 얽매여 구속받지 않도록 시대에 따라 변화할 줄 알아야 하고 새롭게 창조하되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글을 짓지 않도록 항상 글의 품격(品格)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