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것 창조한다고 망가지기보다 옛것 본받더라도 고루한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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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것 창조한다고 망가지기보다 옛것 본받더라도 고루한 편이 낫다”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5.11.0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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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④ 옛것과 새것의 변통과 통섭…법고(法古)와 온고(溫故)의 미학⑤
 

[한정주=역사평론가] 다시 앞서 인용했던 박지원의 ‘초정집서’로 돌아가 보자. 여기에서 박지원은 제자 박제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대표적인 사례로 회음후 한신(韓信)의 ‘배수진(背水陣)’을 소개한다.

“회음후 한신이 사용한 ‘배수진’은 당시 병법에서는 볼 수 없는 진법이었다.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여러 장수들이 배수진을 펼치겠다는 한신의 명령에 불복했다. 그때 한신은 ‘배수진은 병법에 나와 있다. 다만 그대들이 제대로 살피지 못했을 뿐이다. 병법에서는 사지(死地)에 놓인 다음에야 살아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라고 말했다.” 박지원, 『연암집』, ‘초정집 서문’

한신은 『손자병법』에 나오는 “위험한 곳에 깊이 빠지면 두려워하지 않고, 물러날 곳이 없으면 강해지며, 죽을 곳에 이르면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내용을 바탕 삼아 ‘배수진(背水陣)’을 창안해냈다. 그리고 한신은 이 ‘배수진’을 펼친 ‘정형(井陘) 전투’에서 불과 2만의 군사를 가지고 조나라의 20만 대군을 무너뜨렸다.

박지원은 한신의 ‘배수진’을 가리켜 “옛것을 잘 배웠기 때문에 상황에 맞추어 제대로 변통(變通: 변화에 통달하는 것 즉 새롭게 창조할 줄 아는 것)할 수 있었음을 드러내 보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박지원의 글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필자는 김정희의 독창적인 서체인 ‘추사체(秋史體)’ 역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훌륭한 사례라고 본다.

박지원의 친손자이자 근대 개화사상의 선구자인 박규수는 김정희가 수십 년 동안 옛 사람의 서법(書法)과 서체(書體)를 배우고 익혀 만년(晩年)에 이르러서야 추사체를 창안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완옹(阮翁: 김정희)의 서체(書體)는 어렸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書法)이 여러 차례에 걸쳐 변화했다. 어렸을 때에는 오로지 명나라의 서예가 동현재(董玄宰: 동기창)에 뜻을 두었고, 중년에는 담계(覃溪) 옹방강을 따라 노닐면서 온힘을 쏟아 그 서체를 본받았다. 그래서 서체가 농후(濃厚)하고 골기(骨氣)가 적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소동파와 미불(米芾)을 따라 당나라 때의 서예가 이북해(李北海: 이옹)로 바뀌어서 더욱 왕성하고 굳세졌고, 마침내 다시 구양순의 진수(眞髓)를 얻게 되었다.

만년(晩年)에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이후부터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구속받거나 남을 따라다니는 경향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여러 대가(大家)들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하나의 서법을 이루었는데 신기(神氣)가 오는 듯해 마치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것과 같았다.

단지 문장가들만이 그렇게 여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간혹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서체가 거리낌이 없고 제멋대로 썼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오히려 신중함과 엄격함의 극치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나는 일찍이 후생(後生)의 소년들에게 완옹의 서체를 가볍다고 여겨 쉽게 배우려고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말하였다.” 박규수, 『환재집(瓛齋集)』, ‘유요선이 소장하고 있는 추사의 유묵에 쓰다(題兪堯仙所藏秋史遺墨)’

박규수의 증언대로 김정희는 평생에 걸쳐 뼈를 깎는 듯한 각고(刻苦)의 노력을 기울인 다음에야 추사체를 자득(自得)할 수 있었다.

김정희는 절친한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평생 서예에 쏟아 붓은 공력을 이렇게까지 표현했다.

“칠십 년을 살아오면서 열 개의 벼루를 갈아 구멍을 내고 천여 자루의 붓을 닿게 했다(七十年 磨穿十硏 禿盡千毫).”

이러한 까닭에 박규수는 위의 글에서 김정희의 서체를 가볍게 여겨 쉽게 배우려는 사람들을 심하게 꾸짖었던 것이다. 그것은 ‘법고(法告)’는 하지 않은 채 ‘창신(創新)’만 하려는 경박한 행위에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추사체의 탄생 과정만을 놓고 본다면 법고(法古)가 지극한 경지에 오르면 저절로 창신(創新)이 나온다고 하겠다.

다시 박지원의 글로 돌아와서 보자. 그는 명나라의 문장가들을 예로 들면서 ‘법고(法古: 옛것을 본받는다)’와 ‘창신(創新: 새롭게 창조한다)’이 대립하는 의견 사이에서 논쟁만 한다면 법고와 창신 어느 한쪽도 가야 할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한 채 폐단에 빠져버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면서 박제가의 글에 대해 평가하기를 “문장을 지을 때 선진(先秦)과 후한(後漢) 시대의 작품을 높게 여기면서도 옛것의 흔적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러나 진부한 말을 피하려고 애쓰다 간혹 근거를 알 수 없는 표현을 사용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내세우는 논리와 주장이 너무 높아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리기도 한다”고 비평하였다. 그러면서 “새롭게 창조한다고 재주를 부리다가 망가지기보다는 차라리 옛것을 본받더라도 고루한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박지원이 ‘창신(創新)’보다 ‘법고(法古)’를 더 중시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박지원은 ‘법고’, 즉 옛것을 잘 배우고 익히기도 전에 섣부르게 ‘창신’ 곧 새롭게 창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자 가르침을 주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일 뿐이다.

당시 박제가의 나이 불과 23세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박지원의 애정 어린 충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박지원의 진정한 뜻은 ‘법고’와 ‘창신’은 항상 공존해야 하고 한 가지로 통섭하고 융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박지원은 북학파 그룹의 일원 중 ‘법고창신’의 글쓰기 철학을 가장 잘 구현한 이로 이덕무를 꼽았다.

“(이덕무는) 문장을 지을 때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에서 널리 채취해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홀로 깊이 탐구해 독창적인 조예(造詣)에 이르렀고, 진부(陳腐)한 것은 결코 좇아 배우지 않았다. 기이하고 날카로웠지만 진실함과 절실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순박하고 성실했지만 어리석거나 변변치 않거나 평범한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수 백 수 천 년이 지난 후에도 한 번 읽어보면 마치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이 아주 또렷할 것이다.” 박지원,『연암집』, ‘형암행장(炯菴行狀)’

실제 이덕무는 ‘법고창신’과 유사한 자신만의 글쓰기 철학을 주창했는데, 그것이 바로 “옛 것을 참작하면서도 지금의 것을 헤아린다”는 뜻의 ‘작고양금(酌古量今)’이다.

‘작고양금’은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 곧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면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니라(옛것을 익히고 새로운 것을 안다면 가히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하다)”라는 구절과 일맥상통한다.

옛것을 익힌다는 온고(溫故)는 옛것을 참작한다는 작고(酌古)과 뜻이 통하고, 새로운 것을 안다는 지신(知新)은 지금의 것을 헤아린다는 양금(量今)과 뜻이 같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속을 벗어난 선비는 하는 일마다 옛 것만을 따르려고 한다. 세속에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는 일마다 지금 것만을 좇으려고 한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몹시 분개하며 배격하니 중도(中道)에 들어맞기 어렵다. 스스로 ‘옛 것을 참작하면서 지금 것을 헤아린다(酌古量今)’ 라는 좋은 방도를 바탕으로 삼는다면, 사군자(士君子)가 중정(中正)의 학문을 하는데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이덕무, 『청장관전서』, ‘세정석담(歲精惜譚)’

즉 옛것을 참작하되 맹목적인 존중이나 추종에서 벗어나 스스로 지금의 것, 곧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깨달아 체득(體得)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문장은 하나의 조화라고 말하면서 옛사람의 문장을 버릴 수는 없지만 그 글에 얽매여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글이란 “스스로 법을 법 삼지 않는 가운데에서 스스로 갖추어지게 되는 것”이므로 오히려 옛사람의 문장을 열심히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통해 새롭고 창의적인 자신만의 글을 터득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앞서 언급했던 김정희가 추사체를 자득(自得)한 과정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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